brunch

바보 상자(?)

by 석담

TV를 즐겨 보지 않는 편이라 퇴근 후의 시간은 브런치를 하거나 OTT 서비스의 최신 영화를 보면서 저녁 시간을 보낸다. 그것도 시들해지면 책꽂이에서 한번 더 읽어 보리라 마음먹었던 소설책을 꺼내어 정독하기도 한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는 7시쯤엔 막장 드라마가 내 눈길을 끌었다. 뻔한 스토리와 결말이지만 막장의 재미는 벗어나기 힘들다.

일일 연속극이 끝나면 뉴스가 나온다. 뉴스를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날의 나의 TV 시청은 끝난다.


그러한 나의 루틴에 변화의 기미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 발단은 세간의 화제 "더 글로리"라는 시리즈물이었다.

설 연휴 내내 나는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며 그 미니시리즈를 섭렵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우연히 돌린 케이블 방송-나는 좀처럼 지상파(KBS, MBC, SBS) 방송 너머로는 채널을 잘 돌리지 않는다-의 화면에 나의 눈이 고정되었다.

낯설지 않은 제목에 그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시청하고야 말았다.


그 드라마는 이보영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대행사라는 미니시리즈 였다. 대행사는 아마도 광고 대행사나 광고 기획사를 의미하는 말 같았다.

보는 내내 나는 몰입하여 각본이 잘 짜이고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 후로 나는 토요일 밤과 일요일 밤을 기다려서 그 프로그램을 볼 계획까지 세우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토요일 밤은 그런대로 견딜만했지만 일요일 밤 자정에 방송하는 그 드라마는 도저히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재방송을 시청하는 편법까지 감행하며 꾸역꾸역 연속 시리즈물을 착실히 보고 있다.


마침내 나의 드라마 시청 탐닉은 그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OTT에서 방영한 후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송중기배우 주연의 '재벌집 막내아들'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매일 저녁 퇴근 후 일과는 그 드라마를 연속해서 몇 편을 본 후에 잠자리에 드는 이상한 풍경이 연출된 것이다.


마침내 아내가 참지 못하고 나의 기행(奇行)에 입을 댔다.

"내한테는 드라마 본다고 빈정거리더니 드디어 드라마 덕후(마니아)가 납셨네"하며 비꼬았다.

나는 유구무언(有口無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에 TV는 바보상자라고 불리었다.

요즘은 그렇게 부르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모든 가정에 TV는 필수 가전이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중요한 정보는 그것을 통해 얻고 익힌다.

또한 재미와 오락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제는 더 이상 텔레비전이 없는 현대인의 삶은 상상하기 조차 힘들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생이었을 때 나는 애들의 공부를 위해 애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집에서 텔레비전을 퇴출한 적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시간이 지날수록 TV가 없는 삶에 잘 적응했고 나름대로 시간 보내는 방법도 잘 연구해서 값진 하루하루를 보냈다. 또한 TV가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우리 가족은 옛날처럼 TV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가족의 큰 변화였다.


아마도 나처럼 드라마에 도취되어 만사 제쳐두고 그것만을 탐닉하는 사람에게 TV는 진정 바보상자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책을 다시 들어야 할 때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