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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트] 양치기 소년

by 석담

때는 1985년 봄이었다.

대학가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흠뻑 취해 있었다.

K는 오늘도 삼성로고가 박힌 검은색 수동 카메라를 메고 캠퍼스 주위를 돌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캠퍼스 주변에는 온통 노천주점이 자리하고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막걸리 파티 중이다.


학생회관 앞에서 만난 절친 C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오른손을 아래위로 흔들며 밥 먹으러 가자는 수신호를 보낸다.

K도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둘은 학생회관 구내식당으로 들어갔다.

C는 동향으로 입학 초부터 알게 되어 같이 도서관에도 가고 술도 같이 마시는 과 동기로 민요연구회 서클에 가입했다.

K는 그 동아리가 의식 있는 학우들만 활동하는 서클이라는 것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둘은 터널처럼 어두컴컴한 학생회관의 복도를 지나 5층에 있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짜장밥을 하나씩 시켜 먹으며 암울한 시대의 아픔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C는 고향이 영주로 서울에 사는 누나 집에서 통학하고 있었다.


"J가 너 좋아하는 거 같던데... CC 되는 거 아니냐?"

"야, 무슨 개 풀 뜯어 묵는 소리냐?"

C의 말에 K는 정색을 하며 얼굴이 붉어졌다.

J는 입학 초부터 K에게 엄청 친절하게 대해주고 다소곳한 태도로 K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 장본인이었다.

경상도 출신의 K는 서울말을 쓰는 J가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기사 마감 때문에 어둑해질 무렵 서둘러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대충 씻고 책상에 앉아 막 타자를 시작하려는데 하숙집 아주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K학생 밥 먹어".

저녁을 먹고 하숙집 앞 평상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데 저만치서 낯에 익은 여학생이 걸어오고 있었다.


초저녁인데 벌써 많이 취한 듯 비틀거리며 K가 있는 쪽으로 열심히 걸어오고 있었다.

K는 단번에 과 동기 J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엉거 주춤한 상태로 일어나 J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K야, 안녕? 나 너네 방에서 잠시만 쉬었다 갈게. 술이 안 깨네."

놀랍게도 그녀는 K의 하숙방에서 술이 깰 때까지 쉬었다 가겠다는 부탁을 했다.

K는 아주 잠깐 자신이 늑대가 되는 상상을 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그렇게 해."

K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승낙을 해버렸다.

하숙방은 K 말고도 다른 학교 신입생과 같이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K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J를 하숙방으로 데리고 들어 갔다.


하숙방이라고 하는 게 주인집 뒤쪽에 날림으로 지은 여러 개의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방음도 제대로 안되고 겨울에는 창호지로 된 문으로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아주 열악한 곳이었다.

K는 방바닥에 푹신한 담요를 깔고 J를 안다시피 하여 그 위에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마음속으로는 도서관에 간 룸메이트가 제발 늦게 와달라고 빌었다.


J는 이불 위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곧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다.

K는 그 옆에 앉아 그녀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그녀의 잠든 모습을 비라보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K는 고등학교 때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별'이 생각났다.

자신이 마치 양치기 소년이 되어 이 여자를 지키고 있다는 상상이 들었다.


그런데, 은연중에 K는 자신의 몸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순간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집 밖으로 나와 담배를 빼어 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책상 앞에서 잠시 졸았는가 했는데 시간은 어느새 10시가 넘어서 있었다.

그녀는 이미 가고 없었고 바람대로 룸메이트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J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기 초라 누구도 J의 부재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늦은 오후, 어둠이 내리기 직전이었다.

강의실에서 바라본 노천광장 계단에 J를 닮은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K는 서둘러 노천광장으로 달렸다.

그리고 J가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J가 맞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과대표 L과 한 몸이 되어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K는 잠시 그들의 키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없이 돌아 서서 터벅터벅 노천광장의 계단으로 걸어 나갔다.

허탈하게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저녁놀에 반사되어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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