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에 건강검진을 예약해 둔터라 전날 저녁부터 쫄쫄 굶고 있었다. 드디어 예약한 9시 반이 되어 복부 초음파를 받고 위 내시경 검사도 받았다. 검사 후 병원 침대에서 한잠 흐드러지게 자고 났더니 시간은 벌써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어차피 늦었으니 차 엔진 오일도 교환하기로 마음먹고 단골 정비소에서 수리를 마쳤다.
아내는 장인어른을 모시고 나보다 먼저 청도의 본가에 가 있었다.
본가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마치고 농막으로 향했다.
이번 주에는 감자를 캘 계획이었으나 비 예보가 있어서 어머니가 감자를 벌써 캐서 깨끗이 담아 정리해 놓으셨다.
나는 이미 마음을 비웠기에 지난 주말처럼 어머니께 화를 내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감자는 굵은 크기부터 감자조림에 적당한 작은 사이즈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었다.
급한 마음에 우선 적당한 크기로 몇 개 골라서 어머니께 삶아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김이 설설 나는 잘 익은 감자를 모두 하나씩 들고 맛있게 먹었다.
장마철에 접어들면서 고추의 상태에 신경이 곤두섰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탄저병이 와서 올해 고추농사는 망친다는 생각에 서둘러 탄저병 예방약과 칼슘약, 그리고 살충제를 섞어 고추밭에 뿌렸다.
대추 어린잎도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대추애기잎말이나방에 의한 피해와 유사해 보였다. 어린 새 잎들만 둥글게 말리면서 말라가는 동일한 증상을 보였다.
농협 경제사업소가 문을 닫은 시간이라 농약 방제는 다음 주로 미뤄야 했다.
밭을 돌아보던 나는 너무 신기해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몇 년 동안 밤이 달리지 않던 밤나무에 예쁜 밤송이가 몇 개 달려 있는 게 보였다. 올해는 처음으로 내 밭에서 자란 밤을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부디 많은 밤송이가 달리면 좋겠다.
농막 앞에는 여전히 많은 꽃들이 각기 다른 색상과 향기를 보여주고 있다.
당아욱, 팬지, 봉선화, 자주달개비, 다람쥐꼬리 세덤, 채송화, 초롱꽃, 도라지꽃, 낮달맞이, 루드베키아가 서로서로 나 좀 봐달라는 듯 뽐내고 있다.
지금이야 꽃이 지천이지만 겨울이 오면 꽃은 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황량한 황토 빛 흙만 남아 꽃의 계절을 기억할 것이다.
내 키보다 한참 더 큰 옥수숫대에는 드디어 옥수수 개꼬리(수꽃)와 옥수수수염이 보이고 작은 옥수수가 달려 잘 영글어 가고 있다. 단호박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좋은 결과를 보여 줄 것 같다. 벌써 핸드볼 공만 한 단호박이 몇 개나 달려 있었다. 자꾸 따서 쪄먹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어 어머니께 따면 안 되냐고 여쭤보니 아직 더 익어야 된다고 하셨다.
수박도 어느새 귀여운 아기 수박을 보여 주었다. 나는 조심조심 가지를 정리하고 아기 수박이 잘 자라기를 빌었다.
올해로 나는 이제 3년 차 주말 농부가 되었다.
첫해에는 풀과 싸우다 보낸 한 해였고, 2년 차에는 농막을 지었던 한 해였다. 그리고 올해는 또 어떤 한 해가 될지 기대가 된다.
얼마 전 정부에서는 불법 농막을 대대적으로 단속하겠다며 농막의 제작과 사용을 제한하는 새로운 법령을 입법예고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취지는 농막을 가장한 초호화 주말농장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주말 농부, 도시 농부들의 거국적인 반대에 직면해 정부는 결국 입법예고 했던 법령을 철회하고 무기한 보류하는 조치를 하고 말았다.
옆집 이모님께 양배추와 양파 수확한 것을 나눠 드렸더니 굵은 살구를 한 바가지나 주시고 다음날엔 조생종 복숭아 기주*를 한 바구니나 주셔서 매일 질리도록 먹고 있다.
우리 밭을 갈아 주신 공 씨 형님께 직접 딴 양배추를 맛보라고 드렸더니 복숭아를 두 상자나 주셨다.
지금 우리 집은 복숭아 풍년이다.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다.
농부는 소박하고 사치하지 않는다. 감자 한 알, 복숭아
한 조각에도 행복한 그들이 농부다.
껍데기만 농부인 호화로운 농부는 농부 흉내만 내는 여전한 도시 사람이다.
* 기주 : 흠이 있거나 벌레 먹은 과일을 촌에서는 이렇게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