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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담 Jan 11. 2022

나의 꿈 이야기

꿈이라는 단어는 낱말 자체에 중의(重義)적인 의미를 내포한 신기한 글자인 것 같다.

허황된 의미의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반드시 이루어 내야만 하는 장래 희망 같은  꿈이 그것이다.

또한 자면서 꾸는 꿈의 의미도  있으니 얼마나 다양한 상황에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지 놀랍기만 하다.


국민학교 3학년 수업시간에 학교 앞 조선소에 불이 났다.

어린 나의 눈에 비친 화재 현장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화재가 난 조선소는 먼 훗날  한진 중공업에 합병될 대한조선공사였다.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한 해고 노동자 김진숙 님이 근무하게 될 그 조선소였다.


학교를 파하고 그날 저녁 잠들기 전 그림일기를 썼다.

오전에 학교에서 목격했던 조선소의 화재현장을 그림으로 그려 그림일기를 썼다. 며칠 후 나는 그림일기를 잘 썼다며 주는 상을 받았다. 태어나서 자력으로 처음 받아 본 상장이었다.

그  사건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나는 기자가 될 자질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대학 입시에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해외 펜팔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초까지 계속했으니 5년쯤 한 셈이다.

그 연유로  영어 문법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영작문에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쌓은 영작 실력은 대학에서 영자신문사 시험을 볼 때도, 졸업 후 무역부서에서  일했을 때도, 그리고 해외시장개척단으로 반년 동안 캐나다에 체류할 때도  도움이 되었다.


대학 입학  후 부모님께 떼를 써서 국산 카메라를 하나 샀다.

학교에서는 항상 그  카메라를 분신처럼 목에  걸고 다녔다.

그리고 퓰리처 상을 노리고 있다는 둥, 로버트 카파 같은 종군 기자가 될 거라는 둥 큰소리치고 돌아다녔었다.

그리고 실제로 부산에서 두 곳의 주요 일간지의 사진기자 시험의 최종 면접까지 가기도 했었다.

세상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대학교 재학 시절 학과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고 영자신문사 일에 진심을 다했다.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졸업하고 오랫동안 백수로 지냈다.

온갖 핍박과 설움의 백수 생활을 끝내고 중소기업 무역부에 취직했다.

무역일을 하면서 해외를 많이 돌아다녔다. 보통 일주일에서 길게는 보름 정도의 해외출장이었는데 가까운 동남아는 물론, 멀리 두바이, 이집트까지   20개국 이상을 돌아다녔다. 영어가 내게 효자 노릇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백수 시절 부산에서 시사 교양지의 기자로 일 년 정도 일했다.

그  잡지는 재정난을 겪다 마지막으로 나는 폐간 소감을 쓰고 문을 닫아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이후로 나의 비자발적 절필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런 나의 잊혀가는 꿈의  불씨를 살리려는 듯  브런치가 내 눈앞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4수 만에 브런치 작가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제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다.

낙만정(樂滿亭)이라는 집필 공간도 마련했다.

이제 제대로 된  글 다운  글을 한  번쯤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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