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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담 Jan 13. 2022

[콩트] 우리  할배  아이니껴?

그가 집안의  뿌리에 관심을 가진 것은 큰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설날이나 추석에 시골에 차례를 지내고 나면 큰아버지는 대동보라고 쓰인  두꺼운 여러 권의 족보책을 펼쳐놓고 사촌 형제들과 그에게 족보 찾는 법을 알려 주셨다.

그는 의성 김 씨 가문의 34세 손이었다.


사촌 형들은 족보 찾는 법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대학시절 사회현상과 정치현실에도 나름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던  그였기에 가문의 뿌리에도 관심이 많았다.


몇 해전 설날이었다. 여느 해처럼 큰아버지는 족보 찾기 강의를 마치고 집안의 중시조 격인 학봉 김성일 할아버지의 훌륭한 업적과 삶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셨다.

학봉 김성일  선생이 등장하면 동시에 등장하는 인물이 서애 류성룡 선생이었다. 그렇다. 징비록의 저자 그  류성룡이다.

두 분은 그 시대를 풍미하던 라이벌 같은 관계로 느껴졌다.


그는 김성일이 일본 통신사로 다녀와서 선조에게 일본의 정세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하며 큰아버지에게 대들었다. 그는 김성일 선생의 다른 업적이나 훌륭한 면모는 덮어 둔 채 조상이 부끄럽다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았었다.

큰아버지는 더 이상 언급을 않으시고 말문을 닫으셨다.


그 이듬해에 큰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명절에  시골에 가도 족보책을 펴 놓고 집안의 뿌리에 대해 설명해 줄 어른이 더 이상은 없었다.

족보 책은 장롱 안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


그는 가문의 뿌리에 대해 심도 있게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하다 대구에 근거지를 둔 종친회 인터넷 카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페 운영자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다가 결국에는 오프라인 모임에 까지 나가게 되었다.

모임은 두 달에 한 번씩 시내의 한식 전문  식당에서 있었다.


회사를 마치고 한 시간여를 운전해 식당에 도착하니 모임은 벌써 시작해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회자 역할을 맡은 카페 운영자가 종친회 어른들께 인사를 올리라고 했다. 그가 쭈뼛거리다 '안녕하세요'하고 고개를 숙이자 사회자는 절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제일 연장자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서너 분께 엎드려서 절을 했다. 그리고 술도 한잔하며 맛있는 저녁을 먹고 그날 모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지나갔다.


두 달 후 두 번째 모임을 알리는 문자를 받고 집안의 장손인 사촌 형에게 전화를 했다. 종친회 모임에 가자는 그의 제안에 사촌 형은 흔쾌히 그러자고 동의했다.

두 번째 모임 날 사촌 형은 종친회가 시작된 후 많이 늦게 도착했다.

사촌 형도 가 처음 왔을 때처럼 어른들께 절을 드리고 식사를 하면서 종친회 분위기에 동화되어 갈 무렵 사회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새로 오신 종친분이 있습니다.

인사 말씀 한 마디 듣겠습니다."

사촌 형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도곡 공파 34대손 ㅇㅇㅇ입니다."

실내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는 학봉 공파인데..."

사회자는 다 같은 의성 김 씨 뿌리라며  괜찮다고 서둘러 그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그 후로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른다.  그는 하릴없이  술잔만 비우며 시간을 때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촌 형이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에게 한마디 했다.

"니는 인마 제대로 알아보고 외야지 우리 할배도 아닌 종친회를 가고 그러노?"

그는 메마른 입술에 침만 바르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한마디 항변했다.

"학봉 선생이 우리 할배 아이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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