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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담 Jan 30. 2022

영어와의 부단(不斷)한 인연

중학교 때 영어를 처음 접한 나는 부산 사투리의 억센 억양으로 영어 발음이 독일어처럼 들리는 바람에 영어수업시간에 친구들의 연구 대상이었다.

연구 대상이라는 게 부정적인 것이 아닌 좋은 의미의  그것이었다.


지금에야 조기 교육이니 영어 유치원이니 해서 어릴 적부터 영어 공부를 많이 시키지만 그 시절엔 학교 수업 외에 특별한 과외의 영어 공부가  없었으니 영어 시험 성적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6년의 영어공부와 대학 4년 동안  영어를 배우고도 졸업 후 외국인을 만나 인사 한마디 제대로 못 나누고 버벅거리는 게 다반사였다.


영어라는  것이 문법, 어휘, 독해  등 다양한 콘텐츠조합으로 이루어진 과목이라 기초부터 제대로 다져진 일부 상위 그룹의 우등생만 만점이 가능한 과목이었다.

그 영어의 다양한 부문 중에도 나하고 특별히  인연이 깊었던 분야는 영작이었다. 물론 그 당시 나의 영작 실력은 소위 콩 굴 리쉬라고 불릴 정도로 다분히 한국식으로 한글을 영어로 옮기는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영어와 친숙하게 만난 건 해외 펜팔을 시작하면서 였다.

그 시절 유행처럼 번지던 해외 펜팔의 열기에 나도 빠져 들었다. 보통 몇 달 정도 하다가 그 열기가 시들해지던 친구들에 비해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펜팔을 통해 영작 실력을 쌓아 나갔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학내 영자 신문사 기자  모집 시험에 지원하였다. 영자신문사 필기시험  대부분의 유형은 영작 시험이었다. 펜팔 경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런데 면접시험 보는 날 사달이 났다. 오전 수업을 끝내고 하숙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는 게 잠이 들어 버렸다.

잠에서 깨어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면접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낙담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학생회관  면접장소로  달렸다.

사람 좋아 보이는 늙수그레한  지도교수님은 일장 훈시를 하셨다.

"부모님이 뼈 빠지게 일해서 대학 보내 놓으니 자식이라는 놈이  잠이나 자빠져 자서 되겠어?"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 면접을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부모님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때까지 현역  영자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며 더 고급의 영작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졸업 후 옃 년 만에 취업한 직장에서 무역 부서로 발령이 났다. 아마도 대학시절의 영자 신문사 근무 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역부서 입사 후 채 6개월이  되지 않아서 해외 출장의 기회가 왔다. 첫 해외 출장 국가는 홍콩이었다.

출장기간 내내 짧은 회화 실력으로 소위 '낱개 영어'와 바디랭귀지가 대부분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귀국 후 바로 영어회화 학원에 등록을 했다.


학원을 6개월 정도 다니고 해외 출장을 1년 동안 3~4회 다니면서 어느 정도 영어 회화에 길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간단한 국제 통화도 가능했다.

그런데 문제는 말하기보다 듣기였다. 네이티브 스피커의 영어 발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움은 미국 출장길에 여실히 드러났다.

어쨌든 무역부서에서 5년간 일하면서 동남아의 각 나라들을 최소 2회 이상은 출장을 갔고 멀게는  인도, 두바이, 이집트, 이탈리아,  그리고 북미의  미국과 캐나다까지 20개국 이상의 해외 국가를 공짜로 돌아다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역부 입사 초기인  1997년에 결혼을 하고 필리핀 보라카이로 신혼여행을 갔다. 친하게 지내던 바이어에게 숙소 예약을 부탁하고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자력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필리핀에 도착하여  국내선으로 갈아타는 공항에서의 에피소드는 지금도 아내의 단골 놀림거리로 소환당하고 있다.

티켓팅을 마치고 필리핀 국내선 공항에 대기 중에 비행기 출발 지연 소식이 전광판에 전해졌다.

방송으로 무어라고 나오는 그 멘트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최종 목적지인 칼리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탑승 안내인 줄 알고 달려 나갔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현재의 직장으로 옮기고 2009년에는 중소기업청에서 주관하는 해외시장개척요원 모집 시험에 합격하여  항공비와 체재비를 지원받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6개월간 체류하는 행운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원어민의 영어는 잘 알아듣지 못하고 "I  beg  your  pardon?"을 남발하지만 어쨌든 영어는 평생 나를 먹여 살린 소중한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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