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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관계를 요청할 수는 없는 걸까?

[서평: 도시의 동물들]

by 무순

이 글은 아래 책에 대한 서평이다.

: 최태규 지음, 이지양 사진. (2025). 도시의 동물들: 동물과 함께 살기 위해 시작해야 할 이야기들. 사계절.


1.


《도시의 동물들》은 수의사이자 ‘곰보금자리프로젝트’ 활동가인 최태규가 글을 쓰고, 시각 예술가 이지양이 사진을 찍은 책이다. 글쓴이 최태규는 2022년에 한국과학기술학회 학술대회에서 주윤정과 함께 <돌봄과 되살림: 회복적 정의로서의 곰생츄어리>라는 발표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발표글을 통해 ‘생츄어리’를 알게 되었고, 이렇게 책 《도시의 동물들》까지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도시”의 동물들이지만, 실제로 최태규는 단지 “도시”만이 아닌 “자본주의(또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동물들을 이야기한다. 한편으로, 《도시의 동물들》은 동물 논쟁을 보는 새로운 관점, 즉 수의사이자 활동가의 렌즈를 제공한다. 글과 내용에 초점을 맞춰 글쓴이인 최태규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지만, 다른 독자들은 이지양이 제공하는 풍부한 사진들에도 충분한 매력을 느끼리라 생각한다.


2.


이 책은 특별한 요약이 필요한 책은 아니다. 각 장마다 서로 다른 동물에 초점을 맞춰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1부는 “인간과 부대끼며 사는 동물”이란 제목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인간과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2부는 그보다는 조금 더 거리가 먼 도심 속 녹지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3부는 “동물 산업”과 관련된 동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말 다양한 동물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책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은 곳곳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그것은 “인간의 주관을 중시하는 ‘관계주의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문제의식”이다(7). 이 같은 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은 아마도 인간의 ‘돌봄’이 반드시 ‘폭력’과 배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통찰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돌봄은 때때로 폭력적이다.

아무튼 이 책은 읽기에 어려운 책도 아니고 저자의 생각도 뚜렷한 책이다. 따라서 내용을 구체적으로 요약하기보다는 몇몇 포인트에 초점을 맞춰서 작가의 견해를 비평하고 싶다.



3.


조금 강한 어조로 말하지만, 작가가 내 비판만큼 순진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약간은 허수아비 때리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먼저, 작가는 언어가 가진 힘을 다소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작가는 “개를 돌보는 일에 동물에게 써온 ‘사육’이라는 말 대신 ‘양육’을 쓴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라고 말한다(79). 물론 작가가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말하는지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언어의 힘을 다소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는 그 자체로 중립적일 수 없으며, 언제나 어떤 의미를 담지하기 때문이다. 즉, ‘사육’ 대신 ‘양육’이란 말을 쓴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양육’이란 단어에는 ‘사육’이란 말이 담지하고 있는 의미를 피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양육’이 담지한 의미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 다른 언어를 찾아내는 일이지, 언어의 변화를 거부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방식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작가의 해결책은 현실주의를 표방한 유토피아적 발상처럼 느껴진다. 쉽게 말하면, 너무 순진하지 않은가? 작가는 우리가 그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예를 들어, “강산이 콘트리트로 덮이고 자동차도로가 동물의 길을 끊어버리는 가운데도 웬만한 야생동물은 인간이 일부러 잡아서 죽이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다시 번성한다. … 우리에게 필요한 ‘무관심’은 그들을 건드리지 않고, 그들이 곁을 지나도록 그냥 두는 것이다.”라고 말한다(158).


이것은 얼핏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동물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심지어 의도치 않더라도 말이다. 과장된 사례를 들자면, 버린 마스크를 푸른바다거북이 삼키고1), 또 다른 거북이의 코에는 플라스틱 빨대가 꽂히는 세상2)에서 말이다. 물론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일 수 있고, 과장된 사례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경계동물”의 ‘경계’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한다는 느낌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에서 ‘경계’는 자연/문화의 경계이다. 말하자면, 자연/문화의 구분은 더 이상 없고(심지어는 처음부터 없었고), 오직 자연문화3)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 인위적으로 자연/문화를 구분하고 경계 짓는다. 그 경계에 있는 존재들, 그들이 바로 경계동물이 아닐까? 이런 해석에서는 경계는 단지 “동물 돌봄의 경계”로 좁혀지지 않는다(51).


그렇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작가의 무관심은 관계 맺기 자체를 거부하는 듯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물론 작가는 그렇게까지 주장할 생각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것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작가는 관계 만들기가 반드시 ‘인간중심적 관계주의’를 내포하기 때문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인간-동물 관계에서 반드시 ‘인간’이 빠져야 할까? 또 작가가 말하듯이, 동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관계는 반드시 왜곡을 일으킨다.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듯이 말이다.


관계 맺기는 반드시 해석을 동반한다. 우리는 관계 맺기 위해 동물을 해석해야 하고, 해석은 반드시 왜곡을 동반한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중심적일 것이고, 그것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있고, 더 나은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 요컨대, 작가는 번역되지 않는 관계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순진해 보인다.


요컨대, 더 이상 인간이 닿지 않는 자연은 없다. 우리는 이미 관계를 맺고 있고,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행히도, 누구도 그 연결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더 나은 관계를 만들자는 요청은 불가능한 걸까?



4.


인상적인 문구들


“동물은 왜 여전히 안간에게 자원으로만 존재하는지 답답할 때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원은 잡아먹기 위한 자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도시인들에게 동물은 귀엽거나 혐오스러운 자원이기도 하다.” (5-6)


“이러한 고양이에게 인간의 ‘구조’는 죽음 혹은 ‘사냥당해’ 평생 감금당하는 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 돌봄과 폭력이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지는 않다.” (26-7)


“TNR이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만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TNR은 길고양이 수를 줄이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36)

“실제로는 일방적이고 한쪽으로 치우친 관계를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가리고 있는 현실에서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종류의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폭력은 인간의 진심과 믿음이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어 더 우려스럽다.” (70)


“개를 돌보는 일에 동물에게 써온 ‘사육’이라는 말 대신 ‘양육’을 쓴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79)

“우리는 늘 누군가를 죽이고, 그들의 죽음을 밟고 살아간다. 그 죽임의 과정이 죽는 자와 죽이는 자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하면 좋겠다.” (126)


“그러나 인간이 부지런히 ‘죽여주지’ 않으면, 동종 간 경쟁 압력이 낮아진 멧돼지는 다시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한반도의 인간은 멧돼지의 천적을 모두 없애버린 죄로 멧돼지를 계속 죽여야 하는 시시포스의 노동을 하게 되었다. ‘공존’이라는 말을 대충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 (173)


“특정한 몇몇 종이 멸종한 역사를 돌아보면, 거기에는 분명하고 직접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멸종이라는 사건은 ‘인간의 욕심’, ‘환경 파괴’ 같은 흐릿하고 넓게 펼쳐진 이유로 일어나지 않는다. 진짜 원인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을 인간 일반의 과오로 덮어버리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자꾸만 ‘인간이 미안해’ 같은 말이 나오고 애꿎은 이들이 죄책감을 느낀다.” (186)


“흔히 ‘공장식 축산’으로 비판받는 현대의 집약식 축산 시설은 도시인이 보지 못하는 곳에 숨겨져 있다. 그래서 죽음은 물론이고 삶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도시에 사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동물의 몸을 조각낸 몇 종류의 근육과 뼈, 내장뿐이라 살아서 펄떡거리던 동물의 몸을 연상하기 어렵다. … 도시인은 동물의 비명을 들으며 혈관을 끊어내고 가죽을 벗겨서 먹을 부위를 칼로 도려내던 수고를 몸에서 망각했다.” (307)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비거니즘도 육류를 대체하는 또 다른 상품을 만들어내야 경쟁력을 갖는다.” (309)


“좁은 수조에 물을 채우고 유기물을 잔뜩 넣어놓으면 쉽게 부패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그 안에 물고기를 넣어두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각종 약물이다.” (325)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옳고 그름은 따져야겠으나, 마틴법 이후 200년이 지나도록 동물학대죄는 대체로 사회적 약자를 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349)




1) 경향신문, <길어지는 코로나 팬데믹…바다는 ‘쓰레기 팬데믹’>, 2020-08-20.


2) 세계일보, <바다거북 코에 박힌 빨대… 자연 파괴로 누가 돈 버는가>, 2023-11-17.


3) 도나 해러웨이. (2021).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옮김. 마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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