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사람의 일, 고양이의 일]
이 글은 아래 책에 대한 서평이다.
: 단단. (2022). 사람의 일, 고양이의 일: 방배동 고양이 일가를 쫓다. 마티.
1.
이 책은 작가가 849일간 집 근처의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며 기록한 에세이책이다. 작가 단단은 시각예술가라고 하는데, 출판사에서 제공한 정보 외에 추가적인 정보를 찾기는 어려웠다. 고양이 사진이 책 중간중간에 적재적소로 들어있는 책이기도 하다.
2.
이 책은 특별히 요약이 필요없는 책이다. 책은 집 근처 공터에서 길고양이 애미를 만난 이후로 849일간 작가가 겪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보다 특별히 더 내용을 요약하기도 어렵고, 요약을 통해 작가가 느낀 감정과 생각, 그리고 기억을 충분히 담기도 어려워 보인다.
3.
아주 사적인 기록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사유를 자극하는 장면들이 많다. 작가는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면서도 더 적극적인 개입에 대해서는 늘 경계하는 자세를 보인다. 예를 들어, 작가는 “민폐라는 이유로 한 종이 추구하는 성에 대한 기본 욕구를 거세하려는 것이야말로 폭력”이 아닌가 질문한다(137). 물론 TNR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민폐라는 이유”로 중성화를 주장한다면, 아주 잘못된 일반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중성화 수술은 폭력적인 선택임에는 분명하다. 요컨대, TNR은 “더” 윤리적일 수는 있어도 윤리적일 수는 없다.
“고양이 개체 수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파헤쳐봐야 했다.”라는 말도 인상적이다(104). 물론 작가는 질문을 던질 뿐 그 이상의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확하게 와닿지는 않지만, “고양이 개체 수를 걱정”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 보인다.
작가는 “고양이를 정말로 위한다면 … 고양이의 일에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도록 자제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개입하지 않는다고 개입할 수 없는 상황도 아닐 뿐 아니라 개입하지 않으면 어떤 관계도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반대로 이미 관계를 맺었다면, 우리는 이미 개입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작가 스스로도 그 사실을 보여준다. 작가가 고양이와 함께 살기 위해 한 일은 단지 밥주기가 아니라 공터를 공원으로 바꾸고, 고양이들을 대변해 다른 사람들과 맞서고, 또 다른 연대를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활동을 어떻게 비개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개입하느냐 안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관계를 만드느냐가 아닐까.
에세이를 잘 읽지는 않지만, 작가의 생각과 감정, 고민이 잘 묻어 있는 책인 듯하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충분히 사서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럼에도 나는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한다. 이 같은 실천들이야말로 관계를 만들어 가는 중요한 방식이 아닐까?
4.
인상적인 문구들
“나는 사람의 지도에 고양이의 지도를 포개고서야 비로소 그동안 보지 못한 세상을 그릴 수 있었다.” (98)
- 모든 사유는 지도에서 한다.
“중성화수술은 고양이가 이 도시에서 사람과 공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자릿세 같았다.” (211)
흥미로운 장면
할머니 고양이 애미도, 딸 점순과 교미한 까망도 이미 귀 끝이 잘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고양이들은 임신을 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작가는 “인간이 아무리 애쓴들 고양이의 일을 통제할 순 없었다”라고 말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213). ①중성화(TNR)된 고양이가 어떻게 임신할 수 있었을까? ②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면, TNR이 상당히 과대평가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