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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결혼은 좀 이상해!

시작도 못하고 끝난 결혼 2

by 임선민

결혼식에 대한 로망을 가진 사람들도 많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았고, 아이도 원치 않았다. 공주 같은 웨딩드레스도 입기 싫었고, 공장형 웨딩홀에서 맛없는 뷔페를 대접하며 단 하루를 위해 큰돈을 쓰는 것도 이해 가지 않았다. 또 아이 없이 둘이서 평생 재미있게 잘 살 자신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넌 참 별나다고 하던 내 의견 모두를 수렴해 준 건 역시 현재였다.

나의 확고한 마음을 현재도 잘 알았기에, 그가 더 열심히 시부모님을 설득했다. 우리 집이야 내 의견을 존중했지만 역시 시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결국 중간 선에서 가족식을 진행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식 자체에 우리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올해 안으로만 하지 뭐.” 라며 대강 날짜만 잡은 상태로 연애를 계속하던 중, 나는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결심을 하게 되었다.


평생직장으로 생각하고 들어온 공무원 생활을 접고 싶어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그는 결혼할 때 집안에서 아예 도움을 받을 형편이 못 됐고, 당장 우리 둘이 모아놓은 자금으로는 서울에 번듯한 아파트 하나를 얻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말부부지만 그래도 결혼이란 걸 하면 원룸 오피스텔이 아닌 아파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월급으로는 평생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지금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찾고 싶었다.


나는 타고난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서른을 넘긴 내가 다시 할 수 있는 거라곤 공부뿐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이 걸리든 엉덩이 붙이고 앉아 노력해 전문직 자격증 하나 얻고 싶었다. 내 결심에 현재는 적극 찬성하며 자기가 있는 쪽으로 와 공부하자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하면 된다며 본인이 내조든 외조든 물심양면 적극 지원해 주겠다고 응원해 주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며 우울해하는 내게 현재는 말했다.

“자기 평생 가슴속 한구석에 미련 남느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합격하고 나서 그 후는 그때 가서 생각하고 울 자기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아무 걱정 말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하자. “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해서 현재가 있는 강원도에서 다음 해 봄쯤 관사를 받아 합치기 위해 우리는 7월의 뜨거운 여름날, 망설임 없이 혼인신고를 했다. 관사가 나올 때까지 얼마나 대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더 서둘렀다. 서류 한 장 작성하니 일주일 후 바로 처리되어 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다. 결혼이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니.


가족식은 11월에 하기로 날짜를 잡았고, 초대를 많이 할 수 없다 보니 각자의 회사 사람들 소수와 정말 친한 지인들에게만 알렸다. 초대 없이 축의금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 염치없다는 생각에 청첩장에는 계좌번호도 넣지 않았다. 꽤 큰 규모의 한정식집을 통째로 빌려 식을 진행했는데, 친척들과 양가 부모님들의 지인들께 자리마다 인사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생각보다 정신없이 끝나버렸다.


식을 생략한다는 것부터가 내 잘못된 생각이었을까? 지금 돌이켜 보면 결혼식을 통해 주변인 모두에게 부부가 됨을 공표함으로써 서로에게 책임감을 부여한다는 의미를 내가 간과해 버린 것 같다. 고집 피우지 말고 남들이 다 하는 결혼식 그냥 해 버릴걸.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고 가족식이 순탄하게 끝났다는 안도감, 후련함 뿐이었다. 이제 남은 건 신혼여행이라 한껏 즐기다 올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내가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마지막 여행이고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신혼여행이니.


여행 일주일 전, 회사에 나의 면직 의사를 밝혔고 절차는 나의 긴 고민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간단했다. 주위의 만류도 다소 있었지만 다들 결혼과 함께 하는 나의 새 시작을 응원해 주었다. 인사팀에 바로 사직서가 보내졌고, 내가 바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신혼여행 중에 나의 면직 확정 공문이 도착한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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