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못하고 끝난 결혼 5
크리스마스에 연락을 받고 현재가 서울로 오기로 한 날까지 며칠을 오만 가지 생각으로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산 송장 상태로 보냈다. 그의 갑작스러운 변심 자체도 당황스러웠고, 내가 처한 상황도 최악이었다. 나는 이미 회사에서 1월 1일 자로 면직 처리가 된 퇴사 예정자이고,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1월 초에는 자취하고 있던 오피스텔 전세도 만기를 앞두고 있었다. 당초 계획은 퇴사와 동시에 집을 빼서 바로 현재와 강원도 관사로 들어가는 거였는데, 그래서 같이 가구랑 가전도 보기로 했는데... 난 현재와 헤어지면 집도 직장도 없는 30대 백수 이혼녀가 되는 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헤어질 수는 없었다. 당장 내가 해야 할 건 변호사 상담이라고 생각했고, 로톡을 깔아 전화 상담을 진행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일방이 요구하면 이혼을 할 수밖에 없냐는 질문에 변호사는 내가 이혼해 주지 않으면 그만이란다. 그리고 외도를 의심해 보란다. 외도라니... 현재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남자가? 설마 하며 일단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의 대응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왔다. 평소 금요일에 퇴근하고 오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근 한 달 만에 만난 현재는 살이 쪽 빠져 있었다. 그리고 나랑 처음 연애 할 때 느낌이 드는 옷차림이었다. 묘하게 낯설었다. 요새 나랑 시간을 보낼 때 이렇게 꾸민 적이 있었던가? 모든 걸 갖고 싶어 하던 나랑 달리 물욕이란 게 없는 사람이었는데 몇 달 사이 옷에도 외모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던 게 문득 생각났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현재는 며칠간 통화 때처럼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얘랑 부딪쳐보지 않아서 몰랐구나. 이 사람이 이렇게 회피형이었다니.
"당연히 사람이니까 마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근데 우린 결혼을 했잖아. 그러면 마음이 어떻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자기 말이 맞아. 근데 사실 내 마음이 식은 건 몇 달 됐고, 우리 신혼여행 가면 난 그래도 좀 괜찮아질 줄 알았어. 자기도 느꼈잖아. 여행도 나 때문에 재미없었다며. 사실 오늘 헤어지려고 온 것도 맞아. 그래도 다시 잘해보려고 내내 마음 다잡고 있었어. 그리고 너한테 미안해서 너 공부할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책임을 져야 하나, 아니면 헤어져야 하나 그 사이에서 계속 갈피를 못 잡고 있었어. 그러느라 연락도 못했고."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 투성이었다. 마음을 다잡으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리고 공부하는 동안만 책임을 진다니?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인가.
네가 이렇게 책임감이 없는 사람인 줄 몰랐다, 나한테 여태 보여줬던 모습들은 다 꾸며낸 거였냐, 난 그래도 너가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하면 기다리겠다, 난 결혼을 너처럼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복잡한 내 마음에 있는 말들을 어떻게 뱉어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회유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질책도 하고 갖은 방법을 다 썼는데 그는 계속 침묵하더니 하루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다. 밖에 나가서 자고 오겠다고. 하루를 더 생각하면 바뀔 수 있는 문제일까? 아닐 것이다. 내일 다시 와서 헤어지자고 하겠지.
"내일이 되면 뭐가 달라져?"
"아니, 지금 말하면 내가 정말 그렇게 행동할 것 같아서 그래."
"지금 헤어질 것 같다는 거야?"
"응."
지옥 같았던 지난 몇 주를 잘 버텼는데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난 내 인생을 다 걸고 널 사랑했고 결혼했는데. 진짜 너무 속상하다."
그간의 마음고생과 걱정과 미움과 아픔이, 모든 게 폭발한 느낌이었다. 정말 흐느끼며 울었다. 현재는 우는 날 안아줬다. 그리고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다.
"미안해, 선민아. 내가 미안해."
갑자기 너무 미안하다며 자기가 잘못했다고, 진짜 정신 차리겠다며 본인이 평생 사죄하면서 살겠다고, 자길 믿고 강원도로 가서 공부하자고 내일이라도 가전을 보러 가잔다. 그런데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믿고 싶었다.
새벽이 될 때까지 울면서 대화를 했다. 결국 나가서 잔다던 현재는 내 옆에서 잠이 들었다. 핸드폰을 몸 쪽으로 붙여서 꽁꽁 숨긴 채로. 난 아침에 일어나서 저 핸드폰을 확인하리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오전 늦게 일어난 현재가 씻으러 들어갔을 때, 옷 주머니에 있던 그의 핸드폰을 풀었다. 카카오톡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잠겨 있었고, 내가 알고 있던 현재가 평소에 쓰던 비밀번호가 아니었다.
뭘 봐야 하지? 통화 목록을 확인하니 일적인 통화 내역뿐이었다. 반신반의하며 네이버 앱을 열었다. 12월 23일-24일 강릉 숙소 예약 완료 내역이 눈에 들어왔다. 나한테 식었다며 연락조차 없었던 그 기간에 누군가와 여행을 갔었구나. 한 달전쯤 뜬금없이 구찌 반지를 끼고 싶다고 했었는데, 두 개를 결제한 내역도 확인했다. 내 두 눈을 의심하고 싶었다. 아닐 거야. 심장이 미친 듯 뛰고 손이 떨렸지만 현재가 샤워를 다 마치기 전에 더 많은 것을 캐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콘돔과 젤 구매 내역이었다.
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