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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Jul 06. 2023

[세계여행] D+3 키토

첫 번째 도시에서 남미 맛보기

경유지 멕시코시티를 떠나 키토로 향하는 새벽비행기는 창 밖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멕시코시티의 야경부터 끊임없이 치는 번개, 키토에 근접했을 때 보이는 험준한 산세와 코토팍시 화산은 절경이었다.



35시간여의 비행이 피곤했지만 키토에 도착했을 때가 현지시각으로 새벽 6시였기에 시차적응을 위해 또다시 잠을 포기하기로 한다. 여정의 시작점인 만큼 안정을 택하고 공항에서 1달 데이터 10기가를 포함한 유심을 35달러에 구매했다. 공항이라 그런지 누가 봐도 눈탱이 맞는 금액이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도시에서 짐을 잔뜩 들고 헤매고 다닐 수는 없다는 생각이 강했다.


공항에서 한국사람 2명을 만나서 키토 시내까지 택시를 나눠 탔다. 한 분은 키토에 1달여간 거주하려 왔고 다른 한 분은 방학 동안 남미여행을 왔다고 했다. 역시 한국 사람들은 안 그런 척하면서 다들 다른 한국 사람들이 어디 있나 늘 스캔 중이다. 



택시에서 본 도시의 첫인상은 험준한 지형 때문인지 색다르게 느껴졌다. 서울이나 부산도 언덕 지형이 많지만 키토는 정말 산과 골짜기에 도시를 건설해 놓은 듯 한 모습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동행들과 하루종일 도시 산책을 했다. 처음 구시가지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 3명이 신나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현지 경찰분들이 관광안내소에서 키토와 에콰도르의 관광지도를 가져다주었다. 이들의 작은 친절이 어쩌면 키토에 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된 첫 번째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익숙한 유럽풍의 건물들이 들어선 구시가지를 둘러싼 언덕마다 빽빽이 들어선 집들이 익숙하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체크인 시간이 되어 중간에 숙소에 들렀다. 40시간여 만에 양말을 벗으니 발 상태가 말이 아니었고 온수샤워를 하니 피로가 몰려왔지만 지금 자버리면 시차적응이 힘들 것을 알기에 다시 시내로 향했다.



정말 유럽 같은 느낌의 구시가지와 미디어에서 본 매연 가득한 정신없는 모습의 숙소 부근, 현지인 상인들이 가득한 활기찬 구시가지 위 언덕의 모습 등 3가지 구역의 대조가 두드러졌다. 전체적으로 관광객은 많이 없었고 음식은 싸고 나쁘지 않았다. 숙소는 하루 6달러 정도의 호스텔이지만 침대도 나쁘지 않았고 온수도 나와서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역시 도미토리는 불편하다.




다음 날은 아침이라 비교적 한산한 숙소 주위를 산책한 뒤 어제 동행 한 명과 같이 적도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래도 키토에 왔으니 남들 다 하는 적도박물관 체험은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1시간 30여분 간 현지 버스로 이동했고, 버스는 중간중간 요금을 걷는 직원과 끊임없이 타고 내리는 잡상인들로 인해 시끄러운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버스의 앞문은 언제나 열려있고 때때로 뒷문도 열린 상태로 달린다. 그리고 도로 상태 때문인지 무지하게 흔들린다. 검표원이 우리가 원하던 정류장과 다른 곳에서 내리라고 안내해 주어서 조금은 걸어서 박물관에 도착했다. 관광객들은 편의상 적도박물관이라 부르지만 이곳의 실제 이름은 케추아어로 태양의 길이라는 뜻의 인티냔 박물관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달걀 세우기, 물의 내려가는 방향 관찰 등은 박물관의 일부일 뿐이고 원주민들의 역사와 문화의 대한 설명도 풍부하게 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도 누가 봐도 관광객 용인 체험들보다 다른 곳에서는 듣기 힘들 원주민 문화의 설명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그 와중에 그래도 왔다고 남들 다 하는 달걀 세우기, 위도 0도 라인에서 사진 찍기 등을 해준다. 



버스정류장과 노선 표시가 없어 몇 대의 버스를 놓치고 다시 1시간 30분여를 잡상인들 덕에 졸다 깨고를 반복하는 채로 시내로 이동해 세비체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남들은 우중충해서 별로라고 하는 키토인데 날씨가 계속 너무 좋아서 그런지 현재까지는 마음에 든다. 그러나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버스와 트럭이 내뿜는 매연이다. 도시의 공기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대형차가 지나갈 때마다 시꺼먼 매연을 사방으로 내뿜고 달린다. 살면서 매연 때문에 목이 칼칼한 느낌이 드는 것은 처음이다. 매연 때문에라도 빨리 도시를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마지막 날에 일어나자마자 호스텔 주인이 방을 옮기라고 했다. 지금 내가 쓰던 방은 원래 작은 그룹이 이용하는 방인데 전에 방이 없어서 그냥 줬다고 한다. 어쩐지 가격에 비해서 침대가 너무 좋다 했다. 옮긴 방은 캡슐호텔같이 작은 방인데 나름 나쁘지는 않고 어차피 하루만 더 묵을 계획이라 큰 반감 없이 받아들였다. 이 날은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4000m가 넘는 지점까지 올라가 도시 전경을 볼 계획을 세웠다. 몇 번 타 봤다고 익숙해진 로컬 버스를 타고 도시 위쪽으로 올라간 뒤 케이블카를 타러 30여 분간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오르막길 초입에서 택시기사들이 호객을 하지만 패기 있게 걸어가겠다고 선언한다. 못 오를 정도는 아닌데 오르막길의 가파른 정도가 상상을 뛰어넘었다. 비교적 비싼 가격인 9달러를 내고 표를 샀다. 사실 혼자 타서 사진도 많이 찍고 조용히 도시를 관찰하려 했지만 3명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타게 되었다. 다들 사진을 안 찍는 분위기고 말도 안 해서 어색하게 20여 분간을 올라갔다. 케이블카 사진은 내려올 때 혼자 탑승하고 많이 찍었다.



전망대의 풍경은 굉장히 넓은 면적에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와 높은 고도 탓에 나무 없이 풀로만 뒤덮인 고산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상당히 추웠다. 밑에서는 오르막길을 걸어야 했기에 반팔을 입고 있었지만 올라오자마자 긴 팔 맨투맨과 경량패딩을 껴입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구름이 낀 날씨 탓에 키토를 둘러싸고 있는 화산의 봉우리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뒤쪽의 산을 볼 수 있는 스폿으로 가려면 오르막을 걸어야 하는데 4000m가 넘는 고도 탓인지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훨씬 힘들게 느껴졌다. 가는 길에 기념촬영용으로 서있던 야마와 알파카를 처음으로 보았다. 오늘은 동행이 없었기에 관광객들이 사진 찍는 도시배경 스폿과 공중그네에서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못 했다). 2시간 넘게 이곳저곳 둘러보다 전망대를 내려오니 마침 하행 케이블카 대기가 아무도 없었다. 혼자 탈 생각에 신나서 빨리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는데 그 순간 한 화산 봉우리의 구름이 걷힌 것이 보였다. 



사진 뒤쪽으로 구름 사이에 만년설이 앉은 봉우리가 보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망대에 더 있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만 좋았으면 저런 봉우리들이 2-3개가 보인다고 한다. 내일 라타쿵가로 이동하는 길에 날씨가 맑아서 코토팍시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버스로 올라온 언덕을 1시간여 가량 걸어서 내려간다. 관광객들은 하나도 없이 현지인들만 가득한 거리인데 위험한지 안전한 동네인지는 모르겠지만 낮의 활기차면서 동시에 평화로운 묘한 분위기가 좋아 그냥 혼자 가로질렀다. 깨끗한 고산의 공기가 가득하던 곳에서 내려오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도시의 매연이 나를 반겨준다. 가운데 사진 속 버스의 배기구를 보면 매연이 잔뜩 나오고 있는데 도로에서 저런 차가 한 대만 지나가도 숨이 턱 막히면서 머리가 어지럽고 목이 칼칼해진다. 오른쪽 사진의 뿌연 것도 버스의 매연과 뭔가를 굽고 있는 노점의 연기가 섞여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아직 숙소로 들어가기는 시간이 애매해 규모가 작아서 빨리 둘러볼 수 있다는 에콰도르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에콰도르의 역사와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생각보다도 더 작아서 컬렉션을 둘러보는 데는 채 20분이 걸리지 않았다. 박물관의 설명들이 스페인어로만 되어 있었는데 70%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서 스스로 놀라웠다. 역시 유럽권 언어들은 비슷비슷해서 배우지 않은 단어라도 뜻을 짐작할 수 있고, 듣는 것보다는 몇 단어를 넘기고도 뜻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텍스트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3일간의 키토여행이 끝났다. 계속 날씨가 좋아서 도시가 생기 있고 알록달록한 느낌이 들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밤에 돌아다니지 않아서인지 그 악명 높다는 남미의 치안도 아직까지는 전혀 모르겠다. 의외의 부분이 있었다면 첫 번째로는 영어가 생각보다 훨씬 통하지 않는다. 호스텔 직원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영어를 아예 하지 못하고 일행에게 듣기로는 공항 입국심사 직원 중에서도 스페인어만 구사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작년부터 남는 시간에 틈틈이 독학했던 스페인어로 살아남기도 나름 재미있다. 스페인어를 완전히 못 했다면 곤란할 만한 상황이 여럿 있었다. 호스텔 체크인 할 때 영어가 불가능한 직원이 방 값 전체를 달라 하니 일단 주고 나서 '나 전에 보증금 냈는데'를 서툰 스페인어로 구사했다. 그러니 직원이 '아 그래?' 하고 방 값을 다시 계산해 주었다. 10달러를 그냥 날릴 뻔했다.


또 하나의 의외인 점은 생각보다 현지인들이 관광객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관광객도 거의 없고 특히 동양인들은 아예 없다시피 하니 인도처럼 현지인들이 빤히 쳐다볼 줄 알았다. 그런데 관광객이 아예 오지 않는 현지인들만 가득한 곳을 걸어도 거의 대부분은 말 그대로 신경도 쓰지 않고 본인들의 삶을 살아간다. 물론 나를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웃는 어린 학생들이나 (나는 이건 전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말로 인사를 여러 차례 건네는 불량해 보이는 젊은 남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수가 오히려 유럽에서보다도 훨씬 적은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점은 날씨였다. 적도박물관에서 가이드가 우스갯소리로 에콰도르에는 계절이 없지만 하루 만에 사계절을 다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나도 도착한 첫날부터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는 경량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춥고 평소에는 긴팔을 입지만 날씨 좋은 낮에는 햇살이 상당히 따갑고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이다. 그래도 고산이라 건조해서 한국처럼 푹푹 찌지는 않아 여행하기에는 너무 좋은 날씨이다. 선크림도 살까 말까 고민하다 동행의 설득에 12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샀다. 다른 물가는 너무 싸서 선크림도 그럴 줄 알았는데 나름 사치품이라 그런지 유심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가장 많은 돈을 들인 제품이었다.


3일간 도시의 많은 부분을 보지는 않았지만 매연만 빼면 물가도 싸고 날씨도 좋고, 무엇보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이국적인 느낌이 가득한 도시였다. 그래도 매연이 너무 심해서 내일 떠나는 게 그다지 아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대충 찾아본 정보를 기반으로 생각해 보면 볼리비아 라파즈가 지금 내가 키토에서 받는 느낌을 몇 배는 더 주는 느낌일 것 같은데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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