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라 쓰고 몸부림이라 읽는다
작가는 마감이 있어야 글을 씁니다. 사실 마감이 없이 스스로 매일 같은 양의 글을 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데드라인은 영감의 원천이라는 말도 있잖아요.ㅎㅎㅎ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감이 발등에 떨어지자 그제야 마감을 위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죠. (모든 작가가 그런 건 아닙니다.ㅎㅎ) 어쨌거나 한 달의 마감 고군분투기를 시작해 볼게요.
글이 집에서도 잘 쓰이면 참 좋겠지만 집에 있으면 청소도 해야 하고, 정리도 해야 하고, 갑자기 안 보이던 것들이 막 보이고, 집 정리를 하게 됩니다. 딴짓도 많이 하고요. 그래서 저는 항상 노트북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데요. 이것에도 규칙이 있습니다. 밥을 먹고 카페에 나가 보통 '몇 시까지 얼마큼 쓰고 돌아와야지.'라는 계획을 세우고 그 시간 안에 꼭 그만큼의 양을 채우고 돌아옵니다. 물론 글이 턱 막혀 안 나오는 날도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든 개발새발이라도 정해놓은 양을 쓴 후에 귀가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마감을 지킬 수 없거든요. 또 무엇이라도 쓰면 수정이 가능한데,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재창조될 수 없기에 아무 말이라도 쓰고 보는 편입니다.
그리고 노트북을 덮습니다. 당일에 쓴 원고는 아무리 봐도 고칠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자료조사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밀렸던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다음날 다시 노트북을 켜고 썼던 것들을 다시 한번 보면서 수정을 합니다. 원고를 쓴 날에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리프레쉬 된 후에,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보면 고칠 점들이 보입니다.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도 떠오르고요. 그러면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을 한 뒤에 오늘 쓸 새로운 분량을 또 씁니다. 수정할 때는 글이 쭉쭉 나가다가 새로운 씬을 쓸 때면 글이 또다시 턱 막히기도 해요. 어떨 땐 수정이 잘 되면서 그 힘을 받아 뒷 씬까지 한 번에 쭉쭉 쓰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날은 한 달에 하루 정도 있을까요...ㅠㅠ)
창작의 고통은 참 다양합니다. 어떤 날은 머리가 아프고, 어떤 날은 배가 아프고, 어떤 날은 온몸이 아프죠. 그래서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컨디션 관리를 제일 신경 쓰는 것 같아요. 원고를 쓰다가 몸살이라도 나면 흐름이 끊기기도 하고, 작업할 시간도 줄어들기 때문이에요. 마감날까지 매일 써야 할 분량을 계산해 두고 작업을 하는데 하루라도 쉬게 되면 다음 날은 두 배의 양을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감도 크고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체력, 건강인 것 같습니다.
저는 보통 늦은 오전에 일어나 뉴스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씻고 나갈 준비를 마친 뒤 간단하게 아점을 챙겨 먹어요. 너무 배가 부르면 졸음이 쏟아지기 때문에 약간 덜 배부른 상태에서 식사를 멈춥니다. 이후엔 오늘 해야 할 작업이 무엇인지 꼼꼼하게 체크합니다. 수정과 새로운 시퀀스, 새로운 씬이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하고요. 노트북을 들고 오후 1시 정도엔 카페에 도착하도록 나가죠. 커피는 주로 제가 좋아하는 콜드브루 라테 혹은 헤이즐넛 라테를 시켜요. 그렇게 작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허기지기도 하고, 배가 고프기도 합니다. 그러나 배부르게 먹을 순 없어요. 졸음이 몰려오면 작업흐름이 또 끊기기 때문이죠.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요. 하루종일 앉아있는 작가에게 다이어트는 평생의 숙제이자 365일 입에 달고 사는 미션이 되어버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살이 덜 찌고, 몸에 좋은 간식을 챙겨 먹게 된 이유입니다. 매일 다른 간식을 먹고 있지만, 주로 건강에 좋고 살이 안 찌는 간식들을 먹습니다. 예전엔 작업할 때면 과자를 즐겨 먹었었는데 몸에 좋지 않은 군것질을 끊고, 건강한 간식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훨씬 몸이 가벼운 것 같아 좋더라고요.
마감을 하다 보면 꼭 중간에 한두 번쯤 어김없이 슬럼프가 찾아옵니다. 내가 쓰는 글이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나는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이게 재밌는지, 보는 사람이 이해가 될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와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휘어잡고, 마음을 흔들기 시작하죠. 이럴 땐 노트북 앞에 앉아있지 않고, 하루 이틀 정도 쉬어주거나 작품에서 멀리 떨어지면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래도 내 작품에 의심이 갈 땐 주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검증이 되고 나면 다시 작품에 몰입하게 되고, 수정 방향이 잡히기도 하더라고요.
또다시 원고를 쓰는 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 밤을 새워서라도 최대한 많이 써야 한다는 걸 작가는 직감적으로 압니다. 그러면 24시간 문을 여는 카페를 찾아 자리를 옮기기도 하죠. 영감이 오시는 날이 흔치 않다는 걸 경험상 알기 때문이에요. 내일 써야지, 하면 떠올랐던 생각들이 허공에 구름처럼 다 날아가버리고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허무함을 느끼고 말죠. 사실 이렇게 영감이 올 때 써 내려간 원고가 초고가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정되는 원고가 가장 퀄리티가 좋습니다.
어떤 날에는 내가 작가가 되기에 소질이 없나 좌절하기도 하고, 이렇게 시작한 원고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합니다. 매일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하얀 종이 위에 깜박이는 커서가 무섭기도 하죠. 어떨 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가 무서워서 다른 원고를 펼쳐두고 그 위에 글을 쓴 적도 있어요. 별 다를 건 없지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더라고요. 이런 시간을 지나고, 마감 막바지가 다가오면 갑자기 마감을 끝내고 하고 싶은 일들을 적기 시작합니다. 대부분 소소한 것들이에요. 영화관 가서 영화 보기, 공원 산책하기, 서점 가서 하루종일 놀기, 네일아트 받으러 가기 등등 버킷리스트도 아닌데 마감 후에 이것들을 할 시간만 바라보며 위안을 삼게 되더라고요.
어느 정도 원고가 마무리되면 마감 5일 전 정도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시 피드백을 보냅니다. 그리고 저는 하루 이틀 정도 다시 작품과 거리를 두고 놀아요. 사람들의 피드백이 오면 일단 모든 피드백을 취합합니다. 그리고 피드백을 생각하면서 다시 제 작품을 천천히 읽어봅니다. 제가 의도했던 것들이 제대로 드러났는지, 하고자 하는 말이 잘 전달되도록 썼는지, 대사가 안 읽히지는 않는지, 사건의 얼개가 허술하지는 않은지 등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죠. 원고를 다 읽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수정해야 할 것들을 다시 한번 체크합니다.
드디어 마지막 수정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때에는 이 원고로 촬영이 들어간다 생각하고 더 꼼꼼하게 수정해요. 또 오탈자가 없는지, 문법상의 오류는 없는지도 체크합니다. 하지만 오탈자를 여러 번 체크해도 꼭 한 두 글자는 오탈자가 나오더라고요.ㅠㅠ 사실 마지막 수정이 가장 떨리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어떨 땐 처음 썼던 초고가 더 낫다고 느낄 때도 많거든요. 그 순간이 오면 결국 선택은 작가의 몫이기 때문에 작가가 더 좋다고 느끼는 초고 씬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또... 나는 지금까지 왜 수정을 했는가... 하며 좌절하고 수정한 원고들을 아까워하기도 하죠. 하지만 더 좋은 극본을 만들기 위해 과감히 버리는 것도 작가를 하면서 배워가는 것 같아요.
한 달 동안 마신 커피가 몇 잔일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하루에 2잔 이상 마셨으니 60잔은 넘겠죠. 마감을 하고, 후련하게 극본을 전송한 뒤에 제가 좋아하는 커피우유를 마셨습니다. 귀여운 모양으로 새로운 커피우유가 나왔길래 살며시 구매해 봤어요. 콜드브루 커피가 들어가서 그런지 많이 달지 않고 맛있더라고요. 마감을 무사히 잘 끝낸 저에게 주는 소소한 선물이랄까요. 어쨌거나 한 달 동안 목표했던 원고를 잘 쓸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수정의 수정을 계속 진행하고 있지만요. : )
지금 쓰고 있는 극본이 세상의 빛을 볼 그날까지, 열심히 고군분투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