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날화 Nov 16. 2021

나는 꽃 누르는 일을 합니다.

꽃으로 그리는 그림을 본 적 있나요?


꽃잎으로 그린 그림을 본 적 있나요?     


저는 꽃잎으로 그림을 그리며 작품 활동과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꽃잎으로 그리는 그림은 압화라고도 불리지만 순 한글로 표현된 꽃누르미라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나에겐 일상이 되어버린 꽃누르미이지만 처음 듣는 분들은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냐고 질문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배워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대부분이 그렇듯 저도 평범하게 공부하고 3 수능을 보고 과를 정할  화학이라는 과목에 꽂혀서 화학과에 들어가게 되었고 어영부영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20살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고 그러다 갑자기 20대의 시간이 멈췄습니다.  

   

21살 학교에서 친구들과 다음 수업을 기다리던 중 걸려온 전화 한 통화

“아빠 사고 났어, 빨리 병원으로 와”라는 엄마의 전화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사고로 생각했습니다.

막상 병원에 가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뭔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명절 때나 뵙는 온 가족들이 오시고 아빠의 친구분들도 한두 분씩 수술실 앞을 채웠습니다.


수술은 해 보겠지만 준비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긴 아빠는 엄마의 지극정성 병간호로 2년 정도의 병원 생활과 오랜 재활을 하면서 지금은 사소한 일상생활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다 생각하지만 아직도 1년에 4~5번은 119를 타고 병원에 가야 하는 응급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언제 응급상황이 생길지 모르다 보니 엄마와 나는 항상 아빠 옆에 있었어야 했습니다.     

학교는 휴학을 하게 되었고 그냥 하루를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던 게 없던 날들이 1년, 2년 쌓이게 되었습니다. 나보다 더 힘든 게 엄마라는 걸 알기에 그 당시에는 모든 걸 엄마와 아빠에게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엄마와 나는 조금씩 일상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눈물이 나올 상황에 이제는 웃기도 하고 서로 시간을 조정해서 각자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꽃누르미(압화)라는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도시농업기술과 라는 처음 들어보는 기관에서 꽃으로 뭔가를 만든다 해서 듣게 된 압화 강의


그때 나이가 27이었습니다.


같이 듣는 수강생분들은 50대~60대 분들이셨습니다. 자녀들 다 키우고 결혼시키고 은퇴 후 취미활동으로 배우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뻘쭘하고 불편했었습니다. 원래도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에 엄마보다 많은 나이 차이는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래서 지금까지 꽃 누르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때 같은 또래 친구들과 수업을 들었다면 그 당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제 상황이 더 무능력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호기심으로 만난 꽃누르미는 조금씩 제게 하고 싶을 일을 만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청하쥐손이_꽃잎이 하트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꽃을 찾기 시작하고 새로운 꽃을 말려보고 싶어 다음 계절을 기다리게 되고 어느 순간 꽃을 말리고 있으면 하루가 지나가 있었습니다.     

시간 되는대로 말려두었던 누름 꽃들로 작품을 만들고 참가에 의의를 두었던 첫 공모전에서 감사하게도 작은 상을 받으면서 붕 떠 있던 20대의 끝이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벌써 대학 졸업하고 취직해서 일을 배우며 쌓아가고 있을 때   

  

다음에는 사과꽃을 말려봐야지

다음에는 더 재밌는 작품을 만들어야지    

 

하고 겨우 하고 싶은 일들이 생기고 앞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막무가내로 부딪히다 보니 큰상도 받고 지원금도 받고 지금은 어엿한 꽃누르미 공방 대표입니다. 힘들 때 시간을 채워갔던 일이 지금은 정말 감사한 일이 되었고 나를 소개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불안합니다.


하지만 요즘엔 수강생분들이 이런 말을 해주십니다.


하고 싶은 일을 빨리 찾아서 좋겠어요   

이 말을 들으면 그래도 내가 잘 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서른다섯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면 빠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잠시 멈춰있는 걸 보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식으로든 멈춰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멈춰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만들어갈지 잘 모르겠다면 우선 해볼 수 있는 일을 해보세요.

제가 꽃 누르는 일을 시작한 것처럼요     


멈춰있던 시간에 겪은 일들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눈을 주기도 하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멈춰있는 걸 불안해하지 마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