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민한 아이, 그리고 나의 첫 육아
딸아이가 세 살 무렵, 나는 친정엄마와 함께 살며 홀로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의 기억 속에는 엄마와 아빠가 함께한 시간은 남아 있지 않다. 그 공백이 내겐 아쉽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이가 상처를 덜 받았다는 점에서 위안이 되기도 했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예민했다. 분유는 입에 대기만 하면 고개를 홱 돌리며 뱉어냈다. 모유도 충분하지 않아 늘 배고픈 얼굴이었고, 그래서인지 잠투정이 심했다. 밤마다 울음을 달래다 지쳐 쓰러질 때면, 내가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두려움이 몰려왔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아이가 젖을 빠는데 갑자기 입에서 피가 흐르던 순간. 피를 토하는 게 아닌가 하며 겁에 질려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아기가 토한 게 아니에요. 어머니 몸에서 난 상처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이는 피가 섞인 젖을 삼키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작은 입술을 보며, 고맙고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뒤섞였다. 몸은 녹초가 되었고, 마음은 늘 불안했지만, 아이가 잠든 틈엔 나는 오히려 더 움직였다. 잼을 만들고, 빵을 굽고, 정신없이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마음을 달랬다.
출산은 서른일곱, 고령 산모에 역아였다. 3D 업종 프로그래머로 살던 시절 디스크 수술을 했던 이력도 있어서, 허리가 다시 아플까 두려워 운동 대신 매일같이 4km 거리를 걸어 출퇴근을 했다. 아이와 조금이라도 더 긴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에 출산 이틀 전까지도 회사에 나갔다. 동료들은 “제발 이제 그만 나오라, 무섭다”며 말렸지만, 나는 끝내 책상을 지켰다. 그리고 그다음 날, 작은 캐리어를 끌며 병원으로 향했다. 진통 한 번 없이 수술실 침대에 누워 하반신 마취를 하고 아이를 맞았다. 그 순간 배 위로 올려진 아기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았다. 손바닥만 한 얼굴, 가느다란 손가락, 숨 쉬는 것조차 위태로워 보였다. 그 작은 생명을 보는 순간,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다행히 출산 후 10개월간 육아휴직을 쓰며 아이와 함께할 수 있었다. 회사가 없는 시간은 고단했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날들이기도 했다. 낮에는 젖 달라 울어대고, 밤이면 잠투정에 몸부림쳤지만, 아이를 안고 있는 그 순간들 하나하나가 나를 지탱했다.
아이와 함께한 첫해는 집 안에서 거의 갇힌 듯 지냈다. 친정엄마가 “백일 전에는 절대 밖에 나가면 안 된다”는 옛말을 굳게 믿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가는 길 말고는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맘카페에 글을 올리고, 댓글에서 건네는 말들로 하루를 버텼다.
백일이 지나 처음으로 아이를 안고 나간 곳은 KFC였다. 내 또래 엄마 두 명이 늦둥이 아이를 데리고 웃으며 수다 떠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가서 한마디 끼어들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쓴 글을 보고 한 언니가 연락을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넉 달 동안은 아이와 함께 신나게 어울리며 지냈다. 지금은 이사와 여러 사연으로 연락이 끊어졌지만, 그 시절의 웃음과 따뜻한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내 딸은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예민한 아이였다. 원하는 건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고, 마트에서 원하는 걸 사주지 않으면 바닥에 드러누워 울기도 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엄마만 바라보는 큰 아기였다. 지금도 가끔 내 품에 파고들어 안긴 채 잠드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엄마라서 힘들지만, 결국 엄마라서 행복하다.
ps. 오늘은 화요일 딸아이는 어제 오늘 혼자 일어나서 학교다녀오겠습니다. 하며 나갔다 하루의 시작이 일단을 평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