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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성적인 회사원 May 07. 2023

[22] 복수의 허무함

사실 복수의 짜릿함은 짧고, 허무함은 길게 지속된다.

복수는 허무하다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도 허무함을 긴 시간동안 겪었다. 그 이유에 대해 한번 자세히 적어보려고 한다. 복수를 하고 나면 밀려오는 허무함에 대해 이해를 하고 난다면, 이 감정에 깊이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복수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공감하지 않는다. '남는게 없다느니' ,'나에게 더 상처를 주었다느니' 하는 말들 말이다. 전부 다 개소리이다.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목표를 정하고, 이를 위해서 집중을 하고 최선을 다하는 순간은 모두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다. 나는 지금 까지 가족을 위해서 신고했다고 말했지만, 이것 역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 자신을 위해서 한 행동이다.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할때, 나의 자존감은 엄청나게 올라간다. 




그래도 복수가 허무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복수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끝나고 나면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회사 일이라든지, 돈을 번다는 것이든지 이러한 목표들은, 목표를 이루고 나도 계속해서 무언가 할것이 있다. 하지만 복수는 다르다. 목표를 이루면 끝이다.




드라마를 통해 예시를 하나 들어보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 이다. 학창시절에 심하게 괴롭힘 당하던 한 학생이, 자신의 온 인생을 걸고 복수를 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몇십년간의 준비 끝에 복수를 성공한다. 주인공을 괴롭힌 가해자들의 인생을 모두다 망가지게 된다.




그런데, 모든 복수를 끝낸 주인공이 마지막에 옥상에서 자살을 하려고 한다. 아마 여기에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복수를 끝내고 나면 이제 행복하게 살면 되지 왜 자살을 하려고 하지?' 라고 말이다. 



내가 주인공인 문동은은 아니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의 마음을 한번 설명해 보겠다. 아마, 복수를 다 끝냈으니, 앞으로 살아갈 '삶의 의미'가 이제 없었을 것 같다. 주인공에게 삶의 의미는 단 하나였다. 가해자들에 대한 복수. 그런데 이것을 이루고 나니까 '더 이상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한 것이다. 허무하기도 하고 말이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살아왔으니, 다르게 사는 방법은 하나도 모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더 글로리의 가장 명대사는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박연진"이다. 주인공은 학창 시절 가혹한 괴롭힘에 자살을 하려고 하나, 박연진 에게 복수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노력해 왔다. 박연진에게의 복수 자체가 주인공에게는 '삶의 의미' 였던 것이다. 



그런데 복수를 이루고 나니 '삶의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자기에게 남은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주인공도 복수의 짜릿한 감정을 느꼈겠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니 밀려오는 이 허무함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더 이상 본인에게는 계속 살아가야 할  '삶의 의미'가 없으니까 말이다. 단 하나 있던 '삶의 의미'가 사라졌으니 무엇을 해도 의욕이 하나도 안 생겼을 것이다. 주인공은 모든 복수를 마무리하고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나의 고통과 시련은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다행히 자살 직전에, 남자친구? 어머니의 부탁으로 결국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그리고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는 마무리된다. 






이 처럼 벼랑 끝에 있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자신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다. 삶이 허무하거나, 번 아웃이 오거나 하는 사람들이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삶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이 '삶의 의미'가 희미한 사람들이다. 




본인의 '삶의 의미'가 희미하기 때문에, 매일매일 겪는 고통과 시련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굳이?, 뭐하러??" 이런 생각이 들어서 포기를 하게 된다. 의욕이 없이 하루하루 연명만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만큼 사람에게 '삶의 의미'는 중요하다. 이것이 강한 사람은 어떤 시련이나 고난도 이겨낸다. 



예를들면 우리나라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의 경우,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많아 감옥에 갇혀서 고문을 받고, 장군직을 박탈당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들이 죽고, 역적으로 몰리는 억울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12척의 배를 끌고 명랑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 억울함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나라를 위해 본인을 희생한다는 건 일반사람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당시 중국에서 이순신 장군의 능력을 알아보고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 제의도 들어왔는데 거절하였다. 장군님은 나를 고문하고, 틈만 나면 죽이려고 하는 국가를 위해서 행동하셨다. 



이건 상식적으로 정말 말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삶의 의미' 로 해석한다면 말이 된다. 나라와 민중들을 일본으로 부터 지키기 위한 '삶의 의미'가 매우 강하였기 때문에, 역적으로 억울하게 고문을 당해도, 가족들이 죽는 슬픈 상황 속에서도 본인의 '삶의 의미'를 지켜나가셨다. 모든 고통과 시련을 감내하셨다. 



'삶의 의미'가 뚜렷하고, 강하였므로 고통들을 견뎌내셨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이렇게 '삶의 의미'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직장 내 괴롭힘 상황 속에서 '내가 겪은 고통과 시련은 무슨 소용이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 존재 자체에 의미가 있나?' 하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삶의 의욕'를 놓아 버린다. 이에따라 일상생활 자체를 못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이 감정은 복수가 끝나고 나면 더 크게 몰려온다. 복수의 짜릿한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끝나고, 허무함에 몸부림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했어야 하는지' 억울함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도 있다. 오랜 시간 괴롭힘에 망가진 나 자신과 주변관계에 대해 후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가만히 돌아보면 잃어버린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이 허무함에 시간낭비를 해도 괜찮다. 자책을 해도 괜찮다. 잃어버린 것들을 후회해도 괜찮다. 하지만 이 생각들에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깊게 들어갈 수록 빠져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 좋으라고 후회 속에서 허우적 대면서 살 것인가. 당신이 그렇게 망가질 수록 가해자는 더 즐거워 할 것이다. 나는 이게 너무나도 싫었다. 당신도 싫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가 '하나'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인은 유태인 말살 정책을 펼쳤다. 독일군에게 학살된 유태인은 600만 명이나 된다. 이들은 유태인들을 수용소에 모아 놓고 독가스로 학살을 하였다. 수용소중 하나인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온 가족을 잃고, 본인만 겨우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쓴 책, '죽음의 수용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수용소 안에서는 '삶의 의미'가 없다. 자유도 없고, 인권도 없다. 억압과 폭력밖에 없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면 누군가는 죽어 있다. 자신과 같이 생활하는 동료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하루하루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나갈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폭력과 죽음이 일상적인 곳이 바로 이 수용소였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이 상황속에서 대부분은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려갔고 미쳐갔다. 제 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랫동안 정신을 유지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그들은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예를 들면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고 시련을 받음으로써, 나의 소중한 누군가는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 , '나를 믿고 기다리는 소중하고 사랑스런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 등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고통에 '삶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사람은 자기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즉,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다. 이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마지막 자유이다. 이 개념을 전문용어로는 '로고테라피'라고 한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가 겪은 일들이 억울하고 화가 나는 건 맞다. 그래도 우리는 과거보다 더 잘 살아가야 한다. 가해자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당신이 겪은 직장내 괴롭힘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다른 피해자분들에게 자주 하는 말을 적어보겠다.



'내가 처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

'선을 넘는 불합리함에 참지 않고 대응하였다'

'내가 신고를 함으로써, 가해자는 행동을 조심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안전해질 것이다'



당신께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해도 된다. 나의 고통에 이러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허무함은 따라오다가 저 멀리 가버린다. 허무함이 가고 나면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한 뿌듯함. 대견함.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런 마음이 올라온다. 나도 안다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을... 그래도 조금씩 노력해 보았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길게 한 이야기는 속담 하나로 다 설명이 된다.



'컵에 물이 반이나 있네? 물이 반 밖에 없네?'



나는 지금 이런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단순하지 않는가?? 당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정말 쉬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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