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피어나는

by 김밍키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을 확인한 후, 약간은 복잡한 얼굴로 남편은 출근 준비를 마친다. 놀라고 기쁘면서도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다.

“오후 반차 쓸게. 같이 병원 가자.”
남편은 그렇게 말하고 일단은 출근의 의무를 다하러 집을 나섰다. 나는 홀로 남겨진 집 안에서,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해진 두 줄을 내려다보았다. 처음보다 색이 더 짙어진 듯했다. 작지만 확실한 무엇이, 내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문득, 호주 여행에서 친구와 나눈 대화가 감쳐 온다.

시드니의 한 서점에서 예쁜 노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떤 디자인으로 살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던 것이다. 친구가 옆에 와서 물었다.
“얻다 쓸 건데?”

사실 그냥 예뻐서 갖고 싶었던 건데,
“산모수첩 용으로 쓰지 뭐.” 하고 얼버무렸다.
“씨앗은 있고?”

우린 그 자리에서 깔깔 웃었다.


그땐 그저 농담이었는데, 정말 씨앗이 있었다니.


가장 먼저, 그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네가 선물한 노트, 바로 쓸 수 있겠는데? 나 임테기 두 줄 나왔어.”

읽음 표시가 뜨고 잠깐의 정적 뒤에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뭐라고? 정말이야?”

화들짝 놀란 친구는 기쁨보다 먼저 미안함부터 꺼낸다.

“헐… 임신한 애를 내가 너무 혹독하게 데리고 다닌 거 아니야? 미안하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의 여행은 하루에 일정 한두 개밖에 없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물론 많이 걷긴 했지만, 오히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걷고 웃고 떠들던 날들 덕분에 새싹이 더욱 건강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함께 가까운 산부인과로 향했다. 접수창구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임신 검사받으러 왔어요.”

얼떨떨한 마음으로 기다리다 곧 채혈실로 들어가 혈액을 뽑았다. 혈액을 통해 측정하는 건 혈중 베타 hCG 수치였다. 소변 테스트기로도 확인할 수 있지만, 혈액 검사가 더 민감하고 정확하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약 20분.

드디어 이름이 불리고,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수치가 1,200이에요. 임신입니다.
다만 아직은 완전 초기여서 자궁 속 아기집은 보이지 않아요. 5일쯤 후에 다시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표정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초름히 들었다.


드문 일이지만, 아기집이 자궁이 아닌 다른 곳에 착상되는 ‘자궁 외 임신’ 가능성도 있다는 글을 봤다.

그래서 꼭 확인하고 싶었다. 내 안에 자라고 있는 새싹이 제자리에, 무사히 자리 잡았는지를.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직 너무 이른 시기였다.
배란일로부터 2주 전후, 그러니까 임신 4~5주 정도에 해당하는 시기. 몸에 변화는 시작됐지만,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가 정말, 생각보다 일찍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다.

불안함과 동시에 감사했다.
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혹은 테스트기를 해보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좋아하는 회 같은 날것들이며, 진한 카페인 음료들을 마구 섭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직감이라는 게 이토록 무서울 정도로 정확할 수 있다니. 그렇게 기묘한 감응은 처음 느낀다.

그리고 문득, 하나님이 날 정말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던한 우리가, 혹시라도 이 작은 생명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할까 봐 이렇게 꿈으로, 마음으로, 알려주신 것 같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집 근처의 카페에 들렀다. 나는 디카페인 라테를 시켰고, 남편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잠시 뒤 돌아온 남편은 꽃다발을 건넸다. 핑크색 거베라 두 송이였다.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꽃다발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새뜻해졌다.


거베라의 ‘감사’, ‘사랑스러운 고백’.이라는 꽃말이 우리의 현재와 어울렸다.

거베라의 개화 시기는 5월부터 10월 사이라고 했다.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긴 계절을 두고 천천히 피어나는 꽃. 우리에게 찾아온 이 생명도, 마침 그 계절에 함께 들어섰다.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조용히 자리를 틀고 있다. 그 꽃잎은 방사형으로 또렷하게 퍼져 있었고, 중심에서부터 바깥으로 뻗은 선들이 생명의 확신 같았다.


우리 안의 새싹도, 그 나름의 속도로 단단히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이미 마음속엔, 작고 환한 무엇 하나가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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