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을 때가 다 돼서

by 문과체질 내과의사

몸이 아픈 환자는 병원을 찾는다.
그 병원에서 잘 낫지 않으면 다른 병원을 찾기도 한다. 고통스런 환자는 한 의사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줄 만큼 인내심이 많지 않다.

얼마 전 70대 할머니 환자가 나를 찾았다.

" 목이 너무 아파서 자주 가던 이비인후과에 가서 약을 타서 먹었는데, 하나도 낫질 않네요.. 그래서 여기도 와봤어요."

" 네~ 그럼 목부터 한번 봐볼까요~? 아- 해보세요~"

할머니의 목을 들여다보았다.
입천장에 하얗고 깊은 궤양이 있었다. 상당히 아플만한 상태였다. 단순 목감기와는 다른 심한 구내염이었다.
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가며 이전 병원에서 쓰지 않았을 만한, 나름의 비법 섞인 새로운 약을 처방해 보았다. 그리고 약에 호전이 있는지 보기 위해, 3일 후 다시 와보시라고 얘기했다.

3일 후 할머니 환자가 왔다.
" 약 드시고 좀 어떠셨어요? 좀 좋아졌나 목 한번 봐볼까요~? "

짧은 순간, 제비 뽑기를 하는 것 같은 묘한 기대감과 긴장감이 들었다.
들여다본 할머니의 목은 상태가 많이 좋아져 있었다. 푹 파였던 입천장의 궤양이 꽤 말끔히 치유되어 있었다.
심각한 병은 아니었지만, 동네병원 의사에겐 어깨에 힘 좀 들어갈 만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다른 병원에서 못 고치던 병을 고친 명의가 되었으니.. 음화하..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나는 쿨하게 할머니에게 말했다. 목소리엔 힘이 잔뜩 들어갔다.

" 어휴.. 목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이제 하나도 안 아프시죠? "

할머니 환자가 말했다.
" 네. 이제 안 아파요. 근데 선생님 너무 죄송해요. 실은 선생님이 처방해 주신 약을 먹어도 목이 너~무 아파서 또 다른 병원에 가서 다른 처방을 받았더니 싹 나았어요... 죄송해요. "

아... 예.. 이번엔 진짜 동네 명의로 소문나나 했는데.. 아니었구나..
의기양양했던 표정은 서서히 썩은 미소로 오버랩되어갔다. 잠깐 힘이 들어갔던 어깨는 금세 다시 처지며, 거북목을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할머니에 대한 나의 호의는 자격지심을 거쳐 냉소로 변해갔다.
나는 말했다.

"... 네... 근데 왜 다시 저한테 진료 보러 오셨어요..?!"

할머니가 말했다.
" 그동안 목이 아파서 밥도 거의 못 먹고, 기운이 딸려서.. 여기서 영양제 수액 좀 맞고 가려고 왔어요. 제일 좋은 거로 놔주세요~"

제일 좋은거 = 제일 비싼거.
할머니에 대한 냉소는 다시 선한 미소로 바뀌어간다.
아.. 나의 이 치졸함이란...ㅜ
동료의사에 대한 우월감에서 할머니에 대한 인색함으로 변했던 내 마음은, 신사임당 지폐에 친절함으로 승화되었다. 아.. 내가 싫다.!
수액실로 가시는 할머니 환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중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도대체 마지막에 갔던 병원에서는 어떤 명약(!)을 썼길래 할머니가 나은 거지?'

이대로 넘어갈 순 없다는 오기에 할머니의 동의를 얻어 '내 약 처방 찾기' 프로그램을 들어가 약을 조회해 보았다.
그걸 보고 나는 책상을 혼자 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마지막에 처방받은 약은 내가 처방한 약과 모양만 다를 뿐, 같은 약이었다! 심지어 그 병원만의 명약이 있긴커녕, 나의 비법(!) 처방을 제외한.. 그냥 단순 감기약만 처방되어 있었다.

수액실로 걸어가는 할머니를 붙잡고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아니면 수액을 다 맞고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라고 하고 싶었다.
할머니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할머니의 구내염은 내가 고친 거라는 걸!

내 약을 먹고 나으셨다는 걸..!!

허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할머니 환자를 그대로 수액실에 보내드렸다.
할머니 환자가 수액을 맞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그동안 냉탕과 온탕을 오간 나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할머니의 병을 고친 게 뭐가 그리 중요한지.
옹졸한 나의 인정욕구는 왜 그렇게 고개를 드는지.

그리고 나에게 내 처방을 믿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는 할머니는 또 얼마나 순수하신 건지.
"이 병원 약은 하나도 안 들어요" 라는 리뷰 댓글이 달려도 이상하지 않은 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니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됐다.
할머니는 정말 내가 처방한 약을 먹어서 나은 걸까..?
구내염이 생기게 한 그 병은, 사실 할머니의 몸이 며칠간 힘들게 회복시킨 백혈구들이 열심히 싸워서 이겨낸 것이 아닐까..?

환자들은 수많은 질병들을 가지고, 동네병원 의사인 나를 찾는다. 감기, 장염, 폐렴, 관절염 등, 나의 전공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지, 오장육부의 무수한 질환들.
그리고 내가 보는 질환 중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마음의 병들.

이 중 내가 정말 치료를 해주는 병들은 몇 개나 있을까.
대부분은 환자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큰 병은 없다고 안심시켜 주고, 마음의 병을 치유할 플라시보 약들을 처방해 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할머니는 그저 나을 때가 다 돼서 나은 게 아닐까.
그리고 살아가며, 그렇게 애쓰며 개입하는 많은 것들. 그중에 대부분은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아닐까..

며칠 후 할머니 환자는 고혈압약 처방을 받기 위해 다시 나를 찾았다. 나는 할머니에게 잘 나은 구내염 약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혈압이 아주 좋다고만 했다.

우리 동네 사거리에 붙은 수많은 병원간판. 그중에 할머니가 왜 나를 찾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 약을 먹고 나은 것도 아닌데.. 나름의 비법을 가진 용한 병원들도 많이 있을 텐데..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그저 혈압이 좋다고만 해서 나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마지막에 찾았던 그 병원의 의사는 그녀만의 명의로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기저기 가봐도 낳지 않을 때 찾을 수 있는 마지막 버팀목으로.
그렇게 인생에선 다 알지 못한 채, 기대로 남아있는 어떤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추운 날씨로 어김없이 감기가 유행하는 겨울.
오늘도 나는 가운을 걸치고, 마스크를 쓰고, 청진기를 꼽고, 아픈 이들의 불그스름한 목을 들여다보며 하루의 진료를 시작했다.
나을 때가 다 되어 나를 찾은 이들에게 또 하나의 기대로 남기 위해.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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