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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이 Sep 26. 2022

초보 운전 일기 2

서른 아홉은 처음이라

    운전이 즐거운 가장 큰 이유는 이 세상에 이 차만큼은 내 마음대로 된다는 거다. 핸들은 내가 잡고 있고, 브레이크와 엑셀도 내 두 발아래 있으니 내 차는 내가 원하는 방향과 속도(차가 막히는 구간 제외)로 움직인다. 물론 인생은 좀처럼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나는 주행 중에 누군가 내 운전습관이나 방식에 대해 첨언을 하면 그게 유난히 싫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마치 내 인생에 간섭하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충고하는 사람들은 나의 안전을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안다. 내 인생에 대해서 충고하는 사람들도 역시나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핸들을 잡은 것은 나다. 여기서 좌회전을 할지 우회전을 할지 직진을 할지 내가 결정하고, 가다 보니 이 길이 아니면 더 멀리 가서 유턴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 및 시간낭비 그리고 그에 이어질 분노도 나의 몫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무언가 또 배울 것이니 결코 헛된 유턴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네가 시행착오를 하지 않도록 내가 도와주는 거야.'라며 충고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시행착오 없는 삶은 살아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비평형화와 평형화를 반복하며 학습한다. 집에서 매일 보는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던 아이는 평형화 상태에 있다. 어느 날 집에 다른 남자가 방문했다. 그래서 그 남자를 '아빠'라고 불렀다. 그런데 엄마가 아이에게 "저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삼촌이야."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아이는 '어? 이상하다 엄마보다 훨씬 키가 크고 수염 자국이 있고 목소리가 걸걸한 사람은 아빠인데?'라고 생각하며 비평형화상태에 빠져 잠시 혼란스러워할 거다. 그렇지만 결국 '아빠'와 '삼촌'을 구분해 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시 아빠와 삼촌의 차이점을 알고 있는 평형화 상태가 된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교육학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다. 이 비평형화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멘붕에 빠졌을 때 가끔 나를 구해준다. 결국 그 과정을 통해 내가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는 것을 알면 좀 버틸만하니까. (그렇다고 멘붕이 좋다는 소리는 아니다.)


  주행 중에 핸들을 잡고 있으면서도 누군가의 주문에 의해 차를 조작하고 있다면 그건 어쩌면 내 삶의 주체성을 잃는 것과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요구에 의해 핸들이 움직이고 있다면 그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원하는 방향이다. 그렇게 운전하는 사람은 운전기사님들밖에 없다. 그러나 살면서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분명히 내 인생인데 다른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너무 자주- 핸들 방향 그리고 엑셀과 브레이크를 밟는 시점을 결정한다. 그래서 그게 너무 익숙해지면 이제 누군가 '어떻게 하라'라고 주문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은 것만 같아 불안하고 초조하다. 사실 잘 가고 있는 건데 아무래도 이거 아닌 것 같고, 내가 잘못한 것 같고 그렇다. 그게 바로 조작(manipulation)이며 가스 라이팅이다.


   모든 사람의 충고에 귀를 닫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중에 정말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있긴 있으니까.

단지 주행할 때, 혹은 살아가면서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내가 원하는 방향인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길이었다면 내가 온전히 인정하며 후회하고, 내 선택이 옳았다면 내가 너무 자랑스럽고 기특할 그런 길인지.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위해 자동차가 작동되는 간단한 이론을 공부하고 크고 작은 공식적인 약속들(교통법규)에 대해 알아야 하듯이,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장차 사회 구성원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대부분의 중요한 규칙들을 다 배운다.


   물론 이론과 실제는 다르기 때문에, 아이들도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고, 잘못하면 혼도 나고, 잘한 일은 칭찬받으며 올바른 행동이 강화된다. 이제 막 면허를 따고 운전을 시작한 초보 운전자들도 이론이야 알지만 막상 도로에 나오면 긴장해서 허둥지둥하다가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어리바리하다가 정신 차리라는 옆 차, 뒤차의 클락션 소리에 기절할 듯 놀라기도 하며, 심한 경우엔 욕도 좀 먹고, 그렇게 배운다.


   어린아이들은 한눈에 봐도 나이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실수에 어른들이 관대하게 받아주는 편이지만, 초보운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많은 초보운전자들은 초보운전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니며 ‘나 좀 봐주세요’라고 격렬히 외치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스티커가 붙여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봐준다.’ 진짜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초보 스티커가 없는데 운전을 비상식적으로 하는 경우이다.


   초보라면, 처음이라면 실수를 좀 해도 괜찮다. 다 그렇게 배워가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모두 다 처음부터 운전을 잘할 수 없다. 모두가 인생을 처음부터 잘 살 수 없는 것처럼. 도로로 처음 나온 초보 운전자와 우리는 똑같다. 우리는 지금 이 인생을 처음 살고 있다. 누구나 처음 사는 이 세상에 몇 번쯤 같은 삶을 살아본 것처럼 모든 것을 순탄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이 어쩌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나의 실수와, 나의 미숙함에 조금은 스스로 관대 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초보가 아닌데, 혹은 사회 초년생이 아닌데 실수를 하는 것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매일 같이 같은 도로를 지난다면 그 도로는 매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실수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실수를 한다면 그건 ‘방심해서’ 일 것이다.


   베스트 드라이버들도 ‘새로운 길’에서는 실수할 수 있다. 새로운 것들은 종종 우리를 예상치 못한 곤경에 빠뜨리니까. 새로운 길을 간다는 것은 인생에서도, 도로 위에서도 긴장되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새로움이 주는 긴장을 즐기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불안하고 걱정되어 초 긴장상태가 된다. 실수해도 괜찮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모두 처음 사는 인생이다. 주야장천 늘 가던 길만 가는 것보다 새로운 길에 들어선 것 자체가 새롭고 다양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멋진 도전이다.


우리 인생은 늘 내가 가는 길이 옳다고 100% 자부할 수 없고, 그래서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인생에도 유턴구간은 있다.


단지 유턴 구간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지만 않기를, 도착지에 이르기 전에 기름이 다 닳아 없어지지만 않기를, 연료 부족 경고등이 켜졌다면 차가 진짜로 멈추기 전에 가까운 주유소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


배우 윤여정 님의 명언이 있었다.  "나도 67살은 처음이야."  나이를 먹으면 무언가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게 쉬워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건 어렵다 했다. 모두가 처음 사는 인생이고, 우리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지만 '그래서 살아볼 만하다'던 그녀의 말이 조용히 그러나 아주 크게 나를 위로한다.


나도 서른아홉은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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