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추억

도망자

by 당이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회사 옥상에 올라 '여기서 떨어지면 아프지 않고 한 방에 죽을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다가 내가 진짜로 떨어져 죽을까 봐 겁이 나서 영혼 갈아 넣던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퇴사 후 계획? 전혀 없었다. 그냥 현실도피였다.


대표님도, 같이 일하던 동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내 업무 퍼포먼스도 좋았고 그 점을 인정받아 높은 연봉도 받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대표님과 동료들에게 멘붕을 안겨준 채 정든 곳을 떠나버렸다.



아무래도 나는 과대평가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내 그릇이 작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못한다.' '내 능력 밖이다'라는 말을 할 수 없던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만 높은 사람이었다.


휴일에도 내 업무 스위치는 꺼지지 않았고 6일 근무인지라 토요일엔 울면서 출근하고 유일하게 쉬는 일요일엔 다음날 출근할 생각에 땅 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출근해서는 또 아무렇지 않게 워커홀릭의 면모를 뽐냈다.


학생들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고, 그들의 성취도를 면밀히 체크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 부단히 노력하며 살뜰히 챙겼다. 그런데 못 챙긴 게 딱 하나 있다.'나 자신'.


나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 좌절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뭐지? 뭘 하면 난 즐거운가?

클루가 전혀 없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일과 내 삶이 거의 동일시될 정도의 삶이었다. 일이 곧 나고 내가 곧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인정을 받고 성취감을 느낄 유일한 것은 일이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자존감을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 당시 공식적인 퇴사 사유는 '일이 너무 많아 힘들어서'였으나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보니 진짜 이유는 '내 그릇이 작아서'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간단한 진리를 모르고 이미 가득 찬 그릇에 일을 계속 들이부었다.


우여곡절 끝에 내 사업체를 운영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고군분투하며 헤매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지난 퇴사 이유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는 아니었다. 왜?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만든 이 공간이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지금 좀 수월하게 버틸 수 있는 건 이젠 조금씩 비우는 법을 연습하고 있기 때문이고, 운 좋게도 나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퇴사 전에 꼭 다음의 것들을 고려해보라 권하고 싶다.


1. 너무 버거워서 못하겠다고 해봤는가?

:못하겠다 혹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무능력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 뿐이다. 과거의 나처럼 당신은 너무 과대평가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못해먹겠는 업무를 하면서 진짜 모르겠고 정말 어려운데 밤을 새 가며 결국 어찌어찌해낸 적이 있다. 근데 그 결과물은 나 조차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 아, 진짜 나도 모르겠더라니까..... 어렵다고!!!!!!!!!!! 모르면 물어보고 배우자. 버겁고, 어려우면 sos라도 쳐서 도움을 받아라.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회사에 기여할 수는 없다.


2. 근무조건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해봤는가?

: 어쩌면 주 6일 근무만 아니었다면, 상담과 수업을 병행하지만 않았다면 나도 지금도 그곳에서 버티고 있을지 모르겠다. 계약서를 쓴 이상 근무 조건 논의는 중간에 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내가 촛농처럼 녹고 있지만 나를 더 갈아 넣어 불 살라야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펑 터져버리기 전에 해결책을 찾았다면 나는 퇴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 상사에게 상담을 요청해봤는가?

:나는 감정의 기복이 크고 가끔은 한 없이 우울해져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 물론 그럴 때도 당연히 울면서 일을 했다.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은 당연한 것이니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근데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 이 세상에서 지금 당장 꺼져버리고 싶은 그런 순간들도 오지 않는가? 그럴 때 친구들을 만나서 내 푸념을 하는 것은 그날의 안주거리로 그냥 사라져 버린다. 상사에게 상담을 요청해보는 것을 권한다. 대표님은 좋은 분이셨는데도 내 감정이 요동을 치는 바람에 미쳐버리기 직전이라는 것을 토로하는 것은 그와 동시에 내 정신이 건강하지 않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너무 프로답지 않으니까. 누가 일을 룰루랄라 즐겁게만 할 수 있냔 말이다. 하지만 알려야 한다. 몸이 아픈 거랑 마음이 아픈 거랑 결국 아픈 건 똑같은데 우리는 유독 마음이 아픈 건 숨긴다. 그리고 돌아보면 그들은 사실 내가 제정신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이런 어려움을 털어놨는데 그런 고민들에 귀를 막고 일 처리만 종용하는 보스라면 그곳은 떠나도 된다.


4. 진정 원하는 게 퇴사인가 연봉 인상인가?

: 연봉 인상을 위해 퇴사를 무기로 쓰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인상을 논의하면 회사의 사정과 당신의 대체 불가능성의 정도를 고려해 조정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앞 문장의 전제는 본인이 진짜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알아서 인상해 주면 좋겠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회사도 결국 이익창출을 목표로 하니까.


5. 본인이 없다면 회사가 안 돌아갈 것 같은가?

:안타깝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나 또한 내가 많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 직장이 혹시 나의 퇴사로 인해 어려워지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러나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퇴사하는 사람은 본인 걱정이나 하면 된다. 그곳은 승승장구했고 아직까지도 매우 건재하다. 물론 그럴 수 있기까지 나의 영혼을 갈아 넣었던 노고가 한몫했다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남의 돈 받고 일하는데 회사 성장에 힘써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었나?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직면하고 돌파하지 않으면 걸림돌은 언제나 나타나며,

걸림돌이 나타날 때마다 도망칠 수는 없다.


내 앞에 놓인 이 장애물, 지금 넘지 못하면 다음에도 넘지 못할 수 있다.

넘기 싫으면 다른 길로 가야겠지. 그런데 새로 선택한 길에도 장애물은 늘 있다는 게 함정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매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부여잡고 일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걸 몸소 깨달은 현자니까. (ㅋㅋㅋㅋ이 포인트에서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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