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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이 Jun 10. 2022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

너무도 평범한 일상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달을 때

"제가 이 지역에서만 17년 진료 봤습니다. 이 정도 상황이면 자궁경부암 2기 정도로 보입니다."


드라마에서처럼 하늘이 노래지거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핑 돌거나 그런 증상은 없었고

'아, 항암은 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가야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병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늘 마주치던 가로수들이, 길 가의 흔해 빠진 꽃들이, 또 그날따라 유난히 화창했던 날씨와 푸른 하늘이 애석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흡사 암 환자의 심정을 겪어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포에 사로잡혀 많이도 울었다.

'아니, 막상 검사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닌데 의사가 어떻게 알아?' 싶다가도

'17년 경력이 있다는데 척 보면 척 아니겠어?' 싶기도 했다.

감정이 요동치는 밤을 보내고 나면 그다음 날은 여지없이 신체리듬이 무너졌다.


허튼짓 안 하고 열심히 공부했고, 졸업해서는 미친 듯이 일하면서 살았는데 좀 쉬엄쉬엄 살 걸 그랬다 싶었고

늘 내 옆에 있어주던 사람들에게 좀 더 따뜻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과 이제 헤어질 준비를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막막했다. 


불안한 마음에 병원에 여러 번 전화해서 검사 결과를 독촉했고, 예상보다 일찍 결과를 통보받았다.


자궁경부암도 아니고,

자궁경부암 바이러스도 없고,

그냥 약간의 염증 소견, 난소 쪽의 혹 의심 정도였다.


'아... 다행이다.'라는 생각과 함께 동시에 올라오는 분노를 억지로 끌어내리느라 무던히 애를 썼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이 비 전문가의 일상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었다. 그녀의 그 풍부한 경력을 바탕으로 한 의견은 결국 오진이었고, 의료 지식이 없는 '을'인 나는 그걸 의심 없이 믿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참으로 애석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배울 이 있다고 했다. 참으로 그렇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보다 많은 지인들이 있지만 정말 '내 사람들'이 누구인가가 자동적으로 정리가 되었다. 극한 공포 속에 감정이 요동치던 그 시간 동안 그들에게 마음속으로 이별을 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조금은 너그럽게 덜 예민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사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이상 그렇게 대단한 문제가 없다.


행복 진짜 뭐 별거 없다. 난 지금도 행복하다. 울고 있지 않고, 큰 고민도 없고, 퇴근하고 돌아갈 집도 있고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특별히 괴로운 일이 없는 게 행복한 거란 걸 마음에 깊이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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