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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lin Jan 09. 2024

도대체 청년은 몇 살까지인가요?

 이미 고백했지만 사춘기 시절을 워낙 험난하게 겪다 보니 후에는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시절의 나는 평범한 학생처럼 살아내야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남들처럼 야자를 적당히 빼먹으며 적당한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그때에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라고 생각했다.


 새벽 여섯 시 반, 덜 뜨인 눈으로 대충 교복에 팔을 껴 입으며 덜컹거리는 봉고차에 올라탈 때도 그 생각을 했다. 평범하게 살자, 사고 치지 말자. 봉고차의 답답한 가죽 시트 냄새가 울렁일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대학교 졸업 후 시골에 내려와 목적지는 없었지만 그때처럼 덜컹거리는 버스에 올라탔다. 

역시나 가죽 시트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하나의 홍보물이 눈에 띄었다.


 '청년도전지원사업'  


 도전 挑戰 은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건다는 뜻도 있지만, 稻田 벼 '도', 밭 '전' 자를 쓴 도전, 

즉 벼를 심는 논밭이라는 의미도 있다. 작년은 나에게 벼를 심는 도전의 해였다.


 졸업한 지 수개월이 지난 후였지만 사회 초년생인 나의 밭에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별다른 목표와 꿈이 없었기에 군데군데 자라 난 짧은 벼들의 모양은 목적 없이 삐뚤빼뚤 자랐다. 졸업 후 어머니의 직장 문제를 이유로 덜컥 연고도 없는 청주에 오게 되었고, 

특히나 외각 중 외각에 왔으니 무기력함과 외로움이 배가 되는 건 당연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삶의 아무런 도전없이 합리화하기 바빴던 시간이었다.


 그렇다, 무엇이든 만져보고 도전해야 할 시기에 나는 황량한 텅 빈 밭이 끊임없이 펼쳐진 동네에 살게 된 것이다. 어떤 벼를 심어야 할지, 어떻게 내 삶의 밭을 가꾸어 나가야 할지 방법을 모르는 농사 첫날의 농부가 된 셈이다.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우울한 취준생의 모습이었다. 사실 취준생이라는 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인데, 어떤 ‘직무’와 ‘직업’을 준비해야 할지 별다른 목표조차 없었기에 어쩐지 취준생이라는 말도 나에겐 과분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은 후, 

배너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문제는 거리였다. 시골 동네에는 물론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었고,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환승해야 했다. 아침마다 족히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를 지금처럼 몸과 마음이 늘어진 내가 성실하게 다닐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도전’이라는 동아줄 같은 단어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저 회피하고 싶었던 ‘취업 준비' ,

자격증을 따세요 ' 가 아닌 ' 도전을 지원한다 ' 라는 문구라니, 어쩐지 나태해졌던 내 마음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이 동네에 연고가 없는 나는 새로운 또래들을 사귈 수 있겠다는 부푼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20대는 한 두 명밖에 보이지 않고, 대부분 30대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던 나는 급히 포털 사이트에 '청년' 을 검색해 보니 

39세까지를 청년이라고 명칭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년 : 신체적ㆍ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30대의 어머니들, 사회에서 소히 말하는 '경단녀' 들 사이의 막내가 되었다.


 우리 기수는 다른 기수들에 비해 연령대가 높았다. 즉, '첫 도전‘ 이 아닌 '다시 도전' 해야 하는 도전자들이 많았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수시 상담 프로그램 시간을 가졌다. 그날의 주제를 통해 각자의 삶을 고백하고 마음의 치유를 받는 시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몇 분이 고백해 주신 삶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는 나에게 많은 용기와 울림을 주었다. 


 30살이 넘는 나이에도 자신을 찾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수업에 참여하는 그들 앞에서 이제는 감히 내가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은 취업 박람회 프로그램을 마치고 근처 시장에 들렀다. 박람회에서 생각보다 일찍 파하게 되어, 약속 시간 전에 붕 떠버린 나는 근처 시장에라도 가야겠다 싶어 혼자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저 멀리서 익숙한 두 얼굴이 보였다. 프로그램에 함께하고 있는 두 분이 저녁 장을 보고 계셨던 모양이다. 바쁘지 않으면 따라다녀도 괜찮겠냐는 물음에 기꺼이 그렇게 하라며 대답해 주셨다. 

 그곳에 큰 반찬가게를 들러 이것저것 따져가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구입하시는 분들을 보니 어머니가 맞긴 맞구나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 속에서는 함께 정체성을 찾아가는 위치에 있다가, 프로그램이 끝나니 저녁 반찬을 걱정해야 하는 어머니의 역할로 돌아간 그녀들이었다.


 꿈에는 나이가 없다는 게 막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창피하지만 나 또한 사회적 나이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 기준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준과 잣대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니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었다. 


 수료식은 끝났지만 다시 한번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표한다. 어린 청년들의 시작과, 농익은 청년들의 새 출발을 응원한다. 누군가 청년 도전 프로그램 끝에 무엇을 얻었냐고 묻는다면 시야가 바뀌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 시야를 얻기까지 수많은 도전이 있었지만, 많은 도전 끝에 얻게 된 이 열매 하나라면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가죽 시트 냄새를 맡으며 머리 아파하던 고등학교 때보다 지금이 더 청년스럽다고 느끼는 나는 청년을 감히 나이로 재단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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