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여덟 시, 고등학교 정문 앞 무채색 승용차들이 줄 지어 멈춘다. 부드럽게 정차하는 다른 차들과는 달리
끼익 소리를 내며 꼭 한 번씩 쳐다보게 만드는 회색 아반떼 주인공의 딸이 이어서 내린다.
누가 보기 전, 재빨리 내리기 위해 차문 손잡이를 미리 쥐고 있었던 학생은 괜스레 투덜거리며 차 좀 바꾸면 좀 좋냐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린다. 기어코 아침부터 엄마 마음에 비수를 꽂는다.
집안 형편이 따라주지 않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장녀가 말이다.
누가 볼 세라 후다닥 내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몇 걸음 아반뗴와 멀어지고 난 다음 등 뒤로 끼익대는 소리가 다시 들려올 때 드디어 엄마 차가 떠났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우리 집 가난을 매번 이런 식으로 등졌다.
예전 대화 속 지나가는 말로 남동생이 엄마 차가 창피해 정문 앞이 아닌 학교 근처에서 내려달라고 했다는 얘길 듣자마자 너무한 거 아니냐고 발끈했지만 사실은 나도 고작 고등학생이었다.
그땐 자동차로 가정 형편을 따지기도 하고 들키기도 한다고 굳게 믿었던 어린 나이였다.
울 엄마 차는 번호판을 안 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옆 라인이 찌그러진 것뿐만이 아니라, 찌그러진 후 어떻게든 혼자 수습해 보겠다고 이상한 회색 테이프를 덧대니 더 얼룩덜룩해졌다. 처음 그 꼴을 본 난 말없이 번쩍이는 테이프를 빤히 쳐다보다 차라리 떼어버리는 게 어떻겠느냐 물어봤지만, 그래도 자기 손을 거쳐간 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고집을 말릴 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는 눈에 띄는 걸 걱정하기보다 그냥 차의 생채기를 가리고 싶었던 거였다. 그래서 걘 그냥 찌그러진 것도 아닌, 테이프를 덕지덕지 덧대 대충 수습한 티가 나는 보기 드문 자동차가 됐다.
찌그러진 자국 위에 테이프를 대충 붙여놓은 게 꼭 우리 가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가적 설명이 필요한 형태. 완전한 가족은 아니지만 고장 나도 어떻게든 고쳐 놓으면 굴러는 간다는 우악스러운 외침.
삶이란 어쩌면 엄마의 자동차 같은 기세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스스로 고쳐 놓은 자동차를 끌고 교회에 갔을 때 수많은 눈들이 우리 차를 향했다.
이걸 왜 이렇게 수습했냐는 답답한 목소리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한탄으로 뭉친 사람들이 차 주변을 무섭게 감싼다. 그들에게 정화 능력이 개미 똥구멍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차는 이미 멀쩡해졌을 텐데.
차를 둘러싼 사람들의 생각이야 뻔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비스 센터에 맡겨 수리를 받았어야지 하는 탄식일 것이다. 쪼그리고 앉아 우리 차의 기스를 보다 바로 옆 그들의 때 빼고 광낸 차창에 비친 우리 가족이 기이하게 삐뚤어져 보였다. 참 이상한 설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등굣길에 엄마 차를 부끄러워하던 내가 그제야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과연 과부의 차에게 뭐라고 할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그럴 돈이 있었다면 끼익 거리는 차의 내부를 먼저 수리했어야 했다. 삐걱거리는 차의 기능적인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보다 과부의 해어진 옷을 먼저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 차는 스물여섯 살이 된 나를 여전히 태우고 있다. 가끔은 따지듯 언제까지 탈 거냐 물어보지만
우리 인생에 얘라도 있어서 이로운 점이 많다며 그것들을 친절하게 하나씩 나열하는 엄마이다.
웬걸 이번 추석에는 신호등 앞 정차 중이었다가 시동이 툭 꺼져 당황했다. 물론 보통 차들은 정차할 때 자동으로 시동이 꺼지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지만, 계속 말했듯 우리 차는 그런 센스가 없는 녀석이다.
오랜만에 본 엄마의 당황스러운 눈동자에 비친 무언가에 빨간불이 켜 졌다. 계기판 앞 경고등 비슷한 것에 불이 들어왔다. 무슨 표식인지 몰라 검색해 보니 빨리 수리를 맡겨야 한다는 말만 눈에 들어왔다. 사실은 예전부터 차를 관 뚜껑에 넣고 못 박을 생각으로 벼르고 있던 나였기에 내심 기대했다. 이참에 우리도 다른 차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엄마에게 미안한 생각 같은 거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기도가 더 센 것을 보여 주듯 다시 시동이 켜졌고, 몇 년 동안 참 진득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던 아반떼는 유유히 정비소로 향했다.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얘와 함께 가겠다는 엄마의 굳은 선언에 말문이 막혔다. 엄마가 아반떼를 버리지 않기로 작정하며 걜 완전히 끌어안아버린 후엔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힘들었다. 몽당연필을 버리지 않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기능적으론 짧아서 더 이상 그냥 손에 쥐기도 힘들어 꾸역꾸역 연필 뒤에 연필캡을 꽂아 쓰는 마음을 안다. 버리기 아까워서도 있지만, 어떤 연필은 미련 없이 보내주는가 하면 이상하게 바닥이 날 때까지 쓰고 싶은 연필이 있다. 이 로맨틱한 고백은 왠지 엄마 혼자 자동차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이던 그 밤중에 시작된 것도 같다.
그런 엄마의 구구절절하고 구질구질한 고백에 현실이 코웃음을 쳤다. 아반떼를 점검해 보니 수리비뿐만이 아니라 타이어도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타이어는 한쪽만 갈면 차가 기울어질 수 있어서 반드시 두 개를 동시에 갈아야 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자본주의 세상에 갇혀 타이어는 왜 한 짝을 동시에 갈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나는 그것보다 왜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듣고 싶었다. 타이어 한쪽에 십만 원이 넘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엄마에게 네가 몽당연필 값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아끼고 벌어도 돈과 눈물은 누가 어거지로 빼내는 것처럼 고통을 수반한 후 술술 빠져나간다.
스스로 빚쟁이라고 부르며 아직까지 학자금을 갚고 있는 내 처지지만 몇 푼이라도 타이어 값에 보태기로 했다. 그간 자신에게 등만 보이던 나를 성실하게 운반해 준 아반떼와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 준 엄마에게 고마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