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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하지 않는다

복주병원에서의 시간

by 조명찬

아버지에게 가기로 했다.

최근 우리 가족은 엄마는 엄마대로 나는 나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따로 면회를 갔다. 한 번에 몰려서 갔다가 한동안 면회를 가지 않는 것보다 각자 분산해서 가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는 누가 언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서울에서 안동에 있는 복주병원까지는 차로 이동하면 3시간 반정도 걸린다. ktx를 타고 가면 편하겠지만 무릎 수술을 해 아직 불편한 엄마의 걸음을 고려하여 차를 타고 가기고 했다. 아버지가 복주병원에 입원한 지도 벌써 2년이 가까워 온다. 이동식 침대에 누워 눈만 껌뻑거리던 아버지는 복주병원에서 눈을 뜨고 말을 하고 앉고 설 수 있게 됐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한 달 동안 의식도 없이 중환자실에 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의 컨디션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더 큰 기적을 자꾸 바라게 된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중환자실에서의 퇴원을 준비하고 재활병원을 알아봐야 할 때 아무런 정보가 없어 막막했던 나에게 처형이 복주병원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병원이 안동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처형이 보낸 복주병원 관련 링크를 눌러보지도 않았다. '자기 부모라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병원에 보낼 수 있겠는가'라는 삐뚤어진 생각으로 한편으론 서운하기도 했다. 어리광이 많고 가족에 대한 애착이 많은 아버지를 멀리 혼자 보낸다는 게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가까이 두고 매일 가서 목소리를 들려주고 손을 만져줘야지 아버지가 힘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가족의 이상적인 마음일 뿐 현실적으로는 아버지를 전문적으로 잘 치료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만 했다. 서울에는 병실이 부족해서 아버지가 옮겨야 하는 시기에 병원을 잡는 게 쉽지 않았다.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얼마 전에 처형이 보내줬던 복주병원 관련 영상을 보게 됐다. 뇌졸중은 발병 후 3개월 동안 얼마나 집중적으로 치료하냐에 따라 환자의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가 앞당겨질 수 있는데 아버지는 발병 후, 한 달을 꼬박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만 있었다. 이미 치료를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는 놓친 후일 수도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아내를 두고 거실로 나와 밤새 복주병원에 관련된 모든 영상을 찾아봤다. 그리고 결심했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병원 상담이 시작되는 시간을 기다렸다. 다행히 아버지가 입원할 수 있는 조건이 맞았다. 날짜만 정해서 병원과 조율하면 됐다. 결정을 하고 나니 맘이 편했다. 이제 엄마와 동생에게 설명만 잘하면 됐다. 모든 일이 그렇다. 비상상황에서는 후에 일어날 일들을 기꺼이 감수하고 진행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때는 그게 나였다. 나는 복주병원으로 옮긴 후 혹시 모를 부정적인 상황에 대한 비난을 모두 받아들일 것을 결심하고 엄마와 동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아버지 입장에서 생각해야 해. 일단 아버지 치료가 최우선이잖아. 곁에 두고 자주 보고 싶은 건 우리의 마음이고 지금은 아버지가 가장 잘 치료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맞아. 서울에 계시는 것보다 자주 가보진 못하겠지만 어차피 지금은 서울에 계셔도 면회가 잘 되지 않잖아. 아버지가 만약 깨어나고 자기를 왜 이렇게 멀리 뒀냐고 투정을 부리면 그때 다시 모시고 오는 것을 생각해도 늦지 않아. 만약 그렇게 투정을 부리신다면 원래 아버지 성격이 돌아오는 것이니 그보다 기쁜 일도 없겠지. 복주병원에서 하는 '존엄케어'라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하는 것 자체가 환자에겐 그보다 좋을 수가 없지. 나는 이곳으로 아버지를 모시는 것으로 결정했어. 혹시 따로 알아본 곳이 있거나 의견들 있으면 같이 생각해 보자고. 하지만 시간을 그리 많지 않아."


엄마와 동생에게 의견을 묻긴 했지만 사실 그건 통보나 다름없었다. 물론 다른 의견이 있었다면 충분히 비교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와 동생은 나의 의견에 적당한 지지를 보내주었다. 나는 이해했다. 그들 역시 내가 처음 느꼈던 것처럼 아버지를 안동까지 보내는 것에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워낙 내가 강경하게 느껴져서 반대 의견을 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결정하고 나면 다른 건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지 나는 더 이상 안동으로 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아예 연고가 없는 곳도 아니었다. 안동은 처가가 있는 곳이다. 아내의 고향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생면부지의 안동으로 가는 것도 다 연이 닿아서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버지를 안동에 있는 병원으로 모신다고 하니 친척들에게서 걱정스러운 말이 들려왔다. 나와 동생은 그렇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 말에 동요했다. 장손인 사촌형이 엄마에게 전화가 와서 왜 그 먼 안동까지 가냐는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고 엄마는 사촌형에게 전화를 해서 설명을 좀 해주라고 했다. 나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엄마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어요. 이건 오직 우리 가족의 일이에요. 다른 사람들이야 가끔 들여다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엄마.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말아요. 이건 오로지 우리의 선택이고 우리 말고는 그 누구도 그 선택을 바꿀 수 없어요. 생각해 봐요. 평소에 얼마나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냐고요. 나는 설명하지 않을 거예요."






2023년 6월에 아버지를 복주병원으로 모셨으니 2년이 다 돼간다. 우리는 2년 전에 했었던 고민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회복기 재활병원에 입원 가능한 시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병원을 곧 옮겨야 한다. 마음 같아선 1년 정도 더 복주병원에서 아버지의 치료를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서울을 기준으로 인천, 경기도로 범위를 넓혀가며 재활이 가능한 병원을 찾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게다가 통합간병이 되는 재활병원에는 뇌졸중 발병이 2년이 다 되어가는 아버지가 입원 가능한 병원이 없어서 재활이 가능한 요양원까지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통합간병이 되지 않으면 간병비가 걱정일뿐더러 뉴스에 나오는 폭력적인 간병인을 만날까 봐 불안하기도 하다. 작년 5월, 아무런 정보도 없던 나에게 복주병원 운명처럼 와주었던 것처럼 기적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수 있을까? 매일 기도 하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는 이 모든 사실을 모른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으로 그저 우리를 맞이할 뿐이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누다가 오는 경우도 있지만 웬만하면 아버지의 밥 먹는 것, 재활 치료하는 것까지 보고 올 때가 많다. 오고 가는 시간 합쳐서 일곱 시간, 아버지를 지켜보는 시간 네 시간. 깨어 있는 하루 온종일을 아버지를 위해 쓴다. 아버지가 웃을 때마다 나도 웃지만 가끔은 아버지의 근엄했던 표정이 그립다. 아버지는 머리가 다친 이후 충동제어가 잘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담당의 선생님이 미리 설명해 주었던 것처럼 아버지는 성적인 충동이 잘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병원에서는 보호자가 놀랄까 봐 세세하게 전하지는 않지만 나는 문득문득 느낀다. 아버지가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어쩔 땐,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설명해주고 싶기도 하다.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신사였는지, 얼마나 근사했는지, 얼마나 위엄이 있었는지....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지금 아버지는 환자일 뿐이다.


복주병원에서 나서며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에 아쉬움이 있지만 아버지가 그래도 편안하게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이 모든 건 복주병원에서 근무하는 모든 분들 덕분이다. 보호자들이 마음 편하게 환자를 맡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는 겪은 사람들만 알 것이다.


그러니 복주병원에 근무하는 분들은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의 가족들 모두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헤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다. 헤어지는 것에 이렇게 고민이 되는 것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복주병원에 의지하고 지냈는지를 실감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복주병원에서의 시간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넘어져서 쓰러졌다. 나는 아버지와 마지막 통화에서 말다툼을 했었다. 그게 내내 나를 괴롭히고 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그런 마음이 아버지가 복주병원에 있는 동안은 그나마 편안했다. 아버지가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고 후, 아내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어떻게 가족들 모두가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아?"


나는 당연한 듯 얘기했다.


"겪으면 안 될 일지만 겪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아파져 버린 사람을 어떻게 원망을 해."


그렇다. 우리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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