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거리로
그날 밤이 떠올랐다.
8년 전, 촛불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춥게 돌아다녀서 그런지 출출했다. 컵라면을 사려고 집 앞에 있는 작은 슈퍼에 들렀다. 계산을 하려는 데 손에 들고 있는 촛불봉을 보고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우리는 먹고 산다고 이렇게 꼼짝도 못 하고 있어요. 대신 다녀와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토요일 집회에 참가하지 못할 것 같았다. 평일에는 가게 문을 열어둬도 공칠 일도 많으니 빚을 지지 않으려면 그나마 손님들이 오가는 토요일만이라도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당연한 일을 하는 건데 자꾸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금요일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가려다 국회 앞으로 갔다. 내내 따뜻했는데 갑자기 추워졌다. 생각보다 국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본격적인 집회는 내일부터인데 이렇게 추운 날에 밤이라도 새울 작정인가? 담요를 덮고 떨고 있는 어린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분노가 차올랐다. 왜 우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가!
주차를 할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기 위해 창문을 열고 국회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정문 쪽이 아니라 여의도 한강으로 가는 2차선의 후면 도로 쪽으로 차를 천천히 몰고 있었는데
밖에서 서 있던 한 남자가 나를 보고 소리쳤다.
"정신 차려! 다들 힘을 합쳐야지."
순간 어이가 없었다. 차를 멈추고 '나도 집회에 참여하러 온 거야. 인마. 너만 정의로운 척하지 마! 지나가는 사람한테 소리 지르는 건 정당한 거냐?'라고 대응해주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는 아내가 타고 있었고 차가 뒤따라 오고 있었다. 갑자기 정차를 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결국 여의도 빌딩 사이 어딘가에 주차를 하고 대로를 건너 국회 정문으로 갔다. 기분이 내내 좋지 않았다. 나에게 소리를 지른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도 나도 어리석게도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 앞사람들의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추웠다. 내일은 더 추울 것 같았다.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사람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얘기를 듣게 됐다.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커뮤니티에서 모인 사람들 같았다. 이 십 대로 보이는 여성 세 명이었다.
"저흰 이제 들어가려고요. 오늘은 체력을 다 쓴 것 같아요. 내일도 나오려면 집에서 충분히 쉬어야죠. 00님도 같이 가요. 오늘 너무 춥게 입고 나왔어요."
"아니에요. 저는 좀 더 있을 수 있어요. 더 있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너무 무리하지 마요. 그리고 내일도 나오면 꼭 연락 줘요. 우리 같이 모여서 있어요."
토요일 내내 귀에 이어폰을 끼고 가게에 있었다. 아내와 저녁을 먹다가 국민의 힘 의원들이 투표를 하지 않고 퇴장을 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모욕적이었다. 치욕적이었다.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무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드니 눈꺼풀이 벌벌 떨렸다.
국민의 힘 의원 108명 중에 여덟 명만 투표하면 될 일이다. 나는 일을 하는 내내 이어폰으로 뉴스를 들으면서 어쩌면 찬성을 하는 마지막 한 명이 되기 위해서 국민의 힘 의원들이 투표장 근처를 맴돌며 눈치게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치는 어차피 쑈니까. 찬성을 하는 마지막 의원이 되면 그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한 번에 받을 수 있으니까. 역사에도 이름이 확실히 새겨질 테니까.
기대하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동안 그들의 행태를 보면....
재산이 늘어난 시기가 공교롭게도 20억 수수 의혹이 있는 시기와 맞물린 여당의 원내대표는 재산 증가의 이유를 전 정부의 부동산 상승 탓으로 돌렸다. 그가 오늘 국회 앞에 울려 퍼진 로제의 ’ 아파트‘를 들었다면 자기를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을까? 도둑이 제 발 저린 법이니까!
K-pop의 성공에 뭐 주워 먹을 것 없나 하고 스타들과 사진 찍기를 앞다투던 정치인들 앞에 진짜 k-pop을 듣고 사랑하는 어린 세대들이 그들의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반짝이는 응원봉은 국민을 무시하는 정치인들에게 그 무엇보다 무서운 무기가 될 것이다.
8년 전, 집 앞에 있는 슈퍼 아저씨가 나에게 건네었던 말을 고스란히 전한다.
"우리는 먹고 산다고 이렇게 꼼짝도 못 하고 있어요. 대신 다녀와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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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집회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일요일인 어제, 다시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뉴스가 나왔다.
'어차피 국민들은 1년이면 다 까먹고 또 찍어준다.'
그들의 현실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추운 곳에서 밤새 오들오들 떠는 사람들을 그는 그저 별 거 아니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자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1면에 투표를 하지 않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얼굴과 이름이 박제됐다. 주말을 보내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그들에게 아주 적절한 국민들의 경고가 됐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혹독한 한 주를 선사해야 한다. 밥을 먹는 그들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야 하며, 커피를 마시는 그들에게 분노의 눈초리를 보내야 한다. 평소에는 바로 끊어버렸던 정치 설문 조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정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그 어떤 폭력이나 폭언도 없이 우리가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지시켜줘야 한다. 국민에게 눈 깔라고 했던 그들에게 이번엔 너희들이 깔라고 얘기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