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2
“여보세요. 피터팬 보고 전화드렸습니다. 가게 내놓으셨죠? 대략적인 조건을 알고 싶어서요.”
“아. 제가 지금은 좀 바빠서요. 내일 다시 한번 전화 주시겠어요?”
5분 전만 해도 가게는 그리 바빠 보이지 않았는데 그 사이 손님이 많이 온 것 같았다. 온 김에 가게의 내부를 한번 둘러봤으면 좋았겠지만 미리 약속을 하고 온 것은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손님을 가장해서 들어가 내부를 살펴보고 싶진 않았다. 별 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게 일종의 기만이라고 느꼈으니까….
외부라도 한번 더 보기 위해 가게 앞을 다시 한번 지나쳤다. 주인은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왔다 갔다 하는 걸 들키면 안 되느냥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며 슬쩍 가게 안을 봤는데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 바빠 보이지도 않는데 굳이 내일로 통화를 미루는 이유가 뭐지? 밀당이라도 하려는 건가?’
찝찝한 기분을 안고 인파를 헤치며 연남동에서 벗어났다.
다음날, 이상하게 전화 걸기가 망설여졌다. 상대방은 별 관심 없는데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야 하는 전화를 해야 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그리 가볍지 않았다.
점심시간을 피해 오후 3시쯤 전화를 걸었다.
“어제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가게 한번 보려고요.”
“아. 네. 제가 아직 부동산에도 안 내놨는데 일찍 연락 주셨네요.”
“피터팬에 직접 올리신 거 아닌가요?”
“네. 올리긴 올렸는데, 이렇게 빨리 전화 올진 몰랐어서….”
이게 무슨 말인가? 가게를 내놓은 건 맞는데 이렇게 빨리 전화 올지 몰랐다니….
당황스러웠다. 가게를 뺄 마음이 있는 건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가게 주인은 가게를 보러 온다면 브레이크 타임에 잠깐 둘러볼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는데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가게를 내놓는 게 상식적인 건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어쨌든 좀 더 급한 사람이 먼저 움직이는 건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로 비협조적인 것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곳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시작도 하기 전에 나는 밀당의 기술에 의해 튕겨졌고 그래서 더욱 안달이 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게 주인과 약속을 잡고 가게를 둘러봤다. 안에 들어오니 생각보다 더 작은 가게였다. 4인 테이블 2, 2인 테이블 2, 6인 테이블 1이 놓여있었는데 손님들이 다닐 동선 외에는 모두 테이블로 가득 차 있었다.
주방을 둘러보려 하는데, 주인이 따라다니며 여기저기를 설명했다. 혼자 볼 시간을 좀처럼 주질 않았다.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10분 만에 가게에서 나왔다. 가게가 작아서도 그렇지만 꼼꼼하게 둘러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곳도 결국 인연이 아닌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가게를 팔려는 의지가 주인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바쁘다고 몇 번이나 통화를 미뤘다.
결론적으로 전화를 하기 싫게 만들었다.
다시 잠시 멈췄뒀던 가게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연남동 말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알아보는데 구의동에 있는 카레집이 눈에 띄었다. 주상복합 1층에 있는 가게였는데 층고도 높고 평수도 40평 정도로 널찍했다. 점심장사를 하기에 제격인 가게였다. 다만 저녁 장사가 좀 애매했다. 작은 곳에서 내공을 쌓고 조금씩 가게를 늘려갈 생각이었는데 평수가 큰 곳은 반드시 직원이 필요했다. 그래도 여러모로 괜찮은 조건이었기 때문에 가게는 한번 볼 필요가 있었다.
구의동 카레집을 보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남동 가게에 한 번만 더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한 번은 더 해봐야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여보세요. 저 얼마 전 가게 보고 간 사람인데요.”
“네. 알죠. 왜 이렇게 전화를 안 주시나 했어요. 사장님이 하시면 잘하실 것 같은데….”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주인의 태도가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비협조적인 것보다는 나았다. 다시 만난 가게 주인은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전보다는 확실히 가게를 내놓을 의지가 있었다. 좀 더 실질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금액도 적당한 선에서 조율이 되었다. 계약금을 이체하고 나니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계약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됐다. 약속한 일자에 금액을 준비했고 권리금 계약이 끝난 후, 건물주와 임대차 계약을 했다. 건물주는 월세 계산을 일주일 정도 미뤄주었다. 본격적인 영업을 하기 전에 가게를 손보는 시간 동안 임대료를 감면해준 것인데 나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건물주랑 작은 일로 실랑이를 할 필요는 없다.
계약이 모두 끝난 후, 전 주인과 건물주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고 나니 가게에는 덩그러니 나 혼자만 남게 됐다. 전 주인이 필요한 물품을 챙겨가느라 어수선한 가게에 앉아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진짜 내 가게다.
직업이 바뀌었다.
새로운 시작이다.
두려움과 설렘이 균형이 잘 맞는 시소처럼 번갈아가며 왔다 갔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