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명찬 Dec 29. 2023

요리의 기쁨

나이를 먹는다-누룽지


엄마는 밥이 남는다 싶으면 커다란 프라이팬에 밥을 얇게 펴 누룽지를 만들었다. 그걸 베란다에 잘 건조해서 가지고 있다가 집에 갈 때마다 나눠주곤 했는데 나는 그걸 받아 들면서도 늘 잔소리를 한다.


-제발. 이런 것 좀 그만 만들어. 집에도 안 먹어서 한참 쌓여있다니까


실제로 누룽지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 집에 쌓이는 게 부담되기도 했지만 누룽지를 만드느라 크고 무거운 프라이팬을 들고 애를 쓰는 엄마의 모습이 상상됐기 때문에 더 싫었던 거다.


살면서 제일 비싸게 먹은 누룽지는 청담동에 있는 회사를 다닐 때 사 먹었던 18,000원짜리 누룽지정식이다. 전날 과음을 해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라 나는 그나마 몇 술이라도 뜰 수 있는 누룽지를 택했다. 물만 마셔도 속이 울렁거렸지만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아직 불편했을 때라 티도 내지 못하고 억지로 누룽지를 몇 숟가락 욱여넣었다. 푹 퍼진 누룽지가 숭늉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천천히 내려갈 때마다 조금 전까지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 좋아졌다. 그래도 먹으면서 '누룽지 따위가 이렇게 비싸도 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함께 나온 젓갈 3종이 질이 좋은 것 같아 이해가 됐다. 게다가 한 술씩 들어갈 때마다 속이 좋아지는 게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정도 가격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날은 그 누룽지가 나를 살리고 있었으니까. 18,000원짜리 누룽지는 남기면 안 될 것 같아 싹싹 비우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금액이 21,600원. 종업원의 실수가 있는 것 같아 정중하게 다시 물어봤는데 금액은 변함이 없었다. 알고 보니 부가세에 봉사료까지 붙은 것!


부가세까지는 어떻게 이해해 보겠으나 봉사료까지 붙는 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그 가게의 룰인데. 다시는 그곳을 가지 않았다. 그렇게 고급레스토랑도 아니었는데 봉사료까지 가격에 붙이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좋아지고 있던 속이 다시 쓰리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엄마에게 더 이상 누룽지를 받을 수 없을 때, 엄마가 정성으로 말려줬던 누룽지. 투정을 부리며 받아온 그 누룽지의 가격을 매기면 얼마나 될까? 가격을 매길 수나 있을까? 그때는 그게 제일 비싼 누룽지가 되겠지. 어디 누룽지뿐이랴? 모든 게 그럴 것이다.


최근 들어 누룽지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가끔 누룽지를 끓인다. 눌은밥이 푹푹 끓여지면서 나는 구수한 냄새만으로도 벌써 속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걸 느낀다는 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 같기도 해서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원래 누룽지를 좋아했던 아내는 나에게 식성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인정하는 게 싫어서 '결혼하니 제대로 못 먹어서 그래.'라고 배배 꽈서 답한다.


누룽지는 두껍고 넓은 음식 같다. 그래서 가늘고 뾰족한 반찬과 함께 먹으면 좋은데 그게 바로 젓갈이다. 젓갈도 굴젓, 조개젓 같이 비릿한 향이 강한 젓갈보다는 저염명란젓이나 낙지젓과 함께 먹는 걸 좋아한다. 젓갈이 없으면 김치를 씻어 종종 썰어 함께 먹는다. 김치가 너무 크면 누룽지의 구수함을 느끼기가 힘들다.


누룽지 하나 먹으면서 참 까다롭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너무 맛있는 걸....

오늘은 엄마에게 너스레를 떨며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 집에 남은 누룽지 있어? 지난 번에 준 거 다 먹었어. 요즘 자주 먹었더니 아주 떨어지니까 불안해 죽겠네.


전화기 넘어 엄마의 미소가, 빨리 전화를 끊고 집에 있는 누룽지를 찾아 보려고 동동거리는 발걸음이 보이는 것만 같다.







이전 08화 요리의 기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