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명찬 Mar 30. 2024

엄마의 퇴원

젊음의 유예기간이란?





비가 온다. 황사비다. 오늘은 엄마가 퇴원하는 날이다. 무릎수술을 하고 2달을 넘게 입원해 있던 엄마는 아무도 없는 집으로 가게 된다. 엄마가 며칠 전에 전화를 했다.


-내가 아직은 집 근처 슈퍼 가기도 힘들 테니. 네가 장을 좀 미리 봐야해.


집에 모셔다 드리고 천천히 해도 될 것을 미리 전화해서 부탁을 하는 것이 웃겨서 농으로 답을 했다.


-아이고 참. 엄마. 그날 해도 되지. 미리 전화를 했어? 엄마 굶어 죽일까 봐?


잘못된 농담이다. 평소에 나와 농담을 잘 주고받는 엄마에게서 침묵이 흘렀다. 며칠 내내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이 맘에 걸린다. 이상을 농담을 하는 건 아버지의 주특기인데....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

아내가 당분간 엄마가 편하게 드실 수 있는 음식과 간식을 박스에 담아두었다. 집에 있어도 되는데 굳이 따라나서겠단다.


가게 매출이 좋지 않아서 10년 동안 적금처럼 붓던 연금보험을 해지했다. 그나마 이 돈이라도 있어 급할 때 쓸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최후의 보루처럼 남겨둔 걸 해지하려니 마음이 씁쓸하다.

별 것 아니다. 이상하게 마음이 우울한 건 비가 와서 그럴 것이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진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안동에 있는 복주병원으로 모신 건 잘할 일이었다. 아직 정상 컨디션은 아니지만(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올지 모르겠다) 누워서 눈만 껌뻑껌뻑 하고 들어갔던 아버지는 지금 아장아장 걸을 수 있으며 가끔은 총명한 눈빛으로 나를 알아보기도 한다.

엄마는 무릎수술 때문에 아버지를 못 본 지 두 달이 넘었다. 두 사람은 영상통화를 가끔 하지만 대화에 영양가는 없다. 아직 아버지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엄마는 오늘 다시 아버지가 없는 빈집으로 간다. 심정적으론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가 더 편했다. 병원에선 재활도 시켜주고 밥도 잘 챙겨주니까. 혼자 있을 엄마가 걱정이다.


나는 요즘 기쁜 일이 별로 없다. 오늘 특히 그렇게 느껴진다. 얼마 전 읽은 임경선 작가의 <다정한 구원>에는 '젊음의 유예'에 관한 말이 나온다. 무척이나 공감했던 단어의 조합이다.

'젊음'이란 물리적인 나이에서 오는 신체의 튼튼함도 있겠지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 많은 걸 할 수 있음에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가장 붙들려 버리는 게 생명의 탄생과 죽음인데.

평균적으로 서른에서 마흔 사이에는 자신을 닮은 새 생명을 만나게 되고, 마흔에서 쉰 사이에는 자신이 닮은 오랜 생명과 이별하게 된다. 대부분이 그렇다.

나는 아이가 없으니 새 생명에는 얽매이지 않아도 됐다. 가끔 아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하긴 하는데 요즘 같아선 그 아이를 제대로 케어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부모님만으로도 벅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와 엄마의 병원을 오가며 나는 생각한다.

이제 나의 젊음은 끝이 났구나.


아직 슬프지는 않다. 슬픈 시간들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다만 '젊음의 유예기간'이 이제 내 인생에서 끝인 것 같아 안타깝기는 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