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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Apr 01. 2024

처갓집에서의 아침

장모님과 간고등어

안동에 왔다. 장모님의 생신이었기 때문.

2016년 3월에 아내와 결혼을 했고 2015년에 인사를 하러 왔으니 안동에 다닌 지도 9년째다.

안동은 장인,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게 첫 방문이었다. 나름 전국을 두루 돌아다닌 나도 안동과는 크게 인연이 없었는데 아내를 만나 평생을 다니게 된 셈이다.


장인, 장모님의 첫인상은 우선 두 분 다 점잖았다. 위엄이 있진 않지만 꼿꼿해 보였고 말씀이 두 분 다 많지 않았다. 어찌나 말씀이 없으셨는지 당시에는 내가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러실 것이라고 착각할 정도.

질문이 있어도 아내를 통해서 질문을 했고 대답을 해도 고개만 끄덕일 뿐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아내가 중간에서 분주하게 이리저리 눈치를 봤던 게 아직 눈에 선하다.


당시 두 분의 속마음이야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생각해 보면 ‘그냥 쑥스러워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두 분 다 내 팔을 잡아 자신들의 앞으로 돌려가며 수다를 떠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제는 장인어른이 어릴 적 집에 있던 농산물을 팔아다가 차비를 만들어 태백 탄광까지 일을 하러 갔던 얘기를 들었다. 태백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거기는 가면 죽을 고생을 한다고 말렸다고. 그때 장인어른이 탄광에 갔다면 당연히 아내는 존재조차 없었을 것이고 나와 장인어른이 이렇게 얘기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살면서 계속 느끼는 건 인간의 인연이 겹겹의 우연과 필연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사람이 이상한 게 말이 많은 부모의 지난 얘기는 지겹지만 다른 부모의 얘기는 귀담아듣게 된다. ‘아유! 또 그 얘기야?’라고 얘기하며 일어날 수 있는 사람과 어찌 됐든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의 차이일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 내 부모의 이야기는 자꾸 잔소리로만 들린다. 반면은 내 부모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역경을 이겨낸 재미난 스토리 같다. 어제 장인어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우리 아버지 이야기도 더 많이 들어줄걸. 또 다른 하나는 이제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말도 80%는 알아들을 수 있겠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경상도 사투리와 사뭇 다른 안동사투리가 강한 두 분의 얘기를 처음에는 50%도 못 알아들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 표정을 보고 아내가 눈치껏 대답을 대신해주곤 했는데(전화통화 할 때는 40%만 알아들었음) 이제는 웬만하면 다 알아들으니 영어권의 나라에서 살면 갑자기 귀가 트인다는데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안동에 와서 특별히 하는 것은 없다. 신혼 때는 식사시간이 정확한 어른들의 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새벽같이(6시 즈음) 아침밥을 함께 먹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아내의 뒤에 숨어 늦잠을 잔다. 가끔은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에 자연스럽게 일어나 ‘그래 어르신들과 오랜만에 나라도 아침을 함께 먹자’라고 생각하지만 몸은 자꾸 꾀가 나서 다시 눈을 감는다. 매우 공교롭게도 그때 딱 소변이 마려울 때가 있는데 화장실에 가서 소변만 보고 잠자리로 눕는 것이 영 어색해서 정말 급하지 않으면 꾹 참고 다시 잠을 청한다.


작년까지 장모님은 자는 우리를 깨워 아침을 먹이려고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짜증이 잔뜩 난 채로 장모님과 일전을 벌인다.


“엄마. 우리는 이 시간에 밥을 먹는 습관이 안 돼서 밥이 안 넘어가. 그러니까 밥 먹으라고 깨우지 마.”


“그래도 한 술이라도 뜨고 다시 자야지. 그리고 너 안 먹는다고 조서방도 안 먹일 수 있나? 밥 굶기지 마라.”


“아니 엄마. 우리는 지금 먹으면 체한다니까.”


“그래. 그러니까 한 술 먹고 다시 자라.”


서로의 말을 듣기는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대화가 생각보다 한참 이어진다 싶으면 나는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서 눈곱을 떼고 물로 머리만 매만진 후 식탁에 앉아 뒤늦게 해결사를 자청한다.


“장모님. 저 먹을 게요. 주세요.”


처음부터 나 혼자라도 아침을 먹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는 건 영 부담스러워서 최대한 나서지 않고 숨죽여 있다가 두 사람의 언쟁이 조금 길어진다 싶으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식탁에 앉는다.


평소 간소하게 식사하는 것을 즐기는 처갓집의 밥상은 사실 특별한 것이 없다. 나물, 김치, 국하나 정도인데 오직 나에게만 특별히 대접되는 것이 있다. 바로 간고등어.


결혼을 하고 사위가 오는 게 좋으면서도 반찬을 뭘 해줘야 하는지 은근 부담이 있었던 장모님은 안동의 짭조름한 간고등어를 유독 맛있게 먹는 게 인상 깊었나 보다. 그 후로 ‘간고등어’는 확실하게 내 차지가 되었다.

가족들이 함께 먹을 고등어는 가운데에 두고 내 것의 몫으로는 따로 한 마리를 접시에 내어주면 나는 가시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알뜰하게 해치운다. 이건 아무도 모른다. 장모님과 나만의 무언의 움직임이고 애정이다.


제사를 모시는 장남이 막내 사위가 된 건 참 축복이다. (반면에 막내딸이 제사를 모시는 며느리가 된 건 불운이겠지만 오늘은 내 입장에서만 얘기하기로 한다.)


이리저리 할 일도 많고 부담도 많은 명절에 차례를 지내고 처가로 향하는 길, 나는 그제야 명절의 기분을 느낀다.


하나부터 끝까지 챙겨야 하는 장남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잘 먹어주고 잘 마셔주고 이야기만 잘 들어주면 되는 막내 사위로 모드 전환이 되는 건 겪은 사람들만 알 수 있는 해방감이다.


오늘은 아침을 안 먹었다. 장모님은 드디어 우리를 깨우지 않았다. 장모님과 아내의 아침밥 언쟁이 없는 최초의 아침이다.


각자 할 일이 있었던 두 분은 이미 밖에 나가고 집엔 우리만 남았다. 아내는 자기의 본가에서 평소답지 않게(?) 푹 자고 있다. 나는 혼자 조금 산책을 할 생각이다. 산책을 다녀오면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안동의 식당을 가볼 생각이다.


재미있겠다.

간고등어와 배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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