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부산 감천문화마을 근처의 아담한 게스트하우스
게스트: 클레어(34세), 파리 근교에서 온 1주일간의 짧은 한국여행자.
캔맥주를 따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해 질 무렵, 감천문화마을의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옥상 테라스에 앉아 있던 나에게, 옆자리의 외국 여자가 말을 걸었다.
“여기… 진짜 예쁘다. 장난감 마을 같아.”
프랑스식 억양이 섞인 영어. 나도 반가운 마음에 바로 영어로 받아쳤다.
“저 세 번째 와요. 볼 때마다 새롭죠.”
그녀는 클레어. 파리 근교에서 온 워킹맘,
이번 여행은 1주일. 딸은 시댁에 맡기고 혼자 왔다고 했다. 우리는 각자 맥주를 들고 해가 질 때까지 테라스에서 수다를 떨었다.
“너 남편은 뭐 해?”
내가 묻자 클레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케팅 쪽. 근데... 주말에도 일해서 늘 혼자 애 키우는 느낌이야.”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국 남자들도 그래. 우리 남편은 좀 나은 편인데도, 애 혼자 보면 꼭 전화해. ‘기저귀 어딨어?’ ‘애가 당근을 안 먹어’ 이런 식.”
그녀는 터지듯 웃으며 맥주를 꿀꺽 마셨다.
“사실, 나 BTS 때문에 한국에 관심 생겼어.”
클레어가 말했다.
“오! 누구 bias야?”
“정국! 완전 귀엽잖아.”
“역시~ 난 RM. 똑똑한 남자 멋있잖아.”
우리는 인스타그램을 열어 BTS 피드를 함께 훑었다.
“이거 봐, 이 콘서트 전설이지!”
“헐 이 사진 미쳤다!”
십대 소녀처럼 꺄르르 웃으며, 그렇게 가까워졌다.
“혹시 ‘더 글로리’ 봤어?”
“당연하지! 송혜교… she's so classy. 그 복수극,
완전 강렬했어.”
“맞아. 나보다 울었어. 너무 현실적이잖아.”
우리는 '사랑의 불시착', '기생충', '인생은 아름다워'까지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수다를 이어갔다.
클레어는 “한국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서 좋아”라고 했고, 나는 “프랑스 영화는 말 없이 분위기로 감정을 전달해서 멋있다”고 말했다.
해운대 루프탑 바 Stella. 밤 9시.
한껏 꾸민 채 자리에 앉은 우리는 뱅쇼를 마시며
재즈 선율에 몸을 맡겼다.
“이거 완전… 드라마 장면 같지 않아?”
“응, 근데 이런 시간이 꼭 필요했던 것 같아. 우리 너무 오래 엄마, 와이프로만 살았잖아.”
클레어의 말에, 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왜 혼자 여행 온 거야?”
조심스레 물었더니,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너무 지쳤어. 일도 하고, 애도 키우고, 시댁이랑도 부딪히고… 그냥 숨 쉬고 싶었어.”
“…나도. 지금은 퇴사했지만, 예전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어. 애 깨우고 밥 먹이고 출근하고, 회의하고, 퇴근하고, 애 재우고… 쓰러지고.”
“Exactly.”
짧은 그 한마디에, 너무 깊은 공감이 오갔다.
“근데 너 한국 드라마 진짜 좋아하더라. 제일 좋았던 거 뭐야?”
“‘나의 아저씨’.”
“오, 나도! 나 그거 보고 울고 또 울었어.”
“그냥… 아저씨가 나한테 말 거는 느낌이었어.
괜찮다고. 너 잘 살고 있다고.”
“진짜, 그 드라마는 마음을 만져.”
우리는 조용히 잔을 부딪혔다.
“우리… 지금 바닷가로 가자!”
“진짜? 지금?”
“지금 아니면 언제 해!”
하이힐을 벗고 모래 위를 달렸다.
해운대 밤바다를 배경으로, 청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야!!!”
“정국아 사랑해!!!”
“미쳤냐고!!! ㅋㅋㅋ”
웃음과 눈물이 엉켜 흘렀다.
그 순간 만큼은, 엄마도 아내도 아닌,
그냥 ‘나’로서 존재했다.
조용한 파도 소리 사이로, 내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클레어가 내 손을 잡았다.
“나도 그랬어. 애 낳고 집에 있었을 땐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게 맞나?’ 싶었어. 너무 예쁜 아기를 안고 있었지만, 세상과 단절된 기분. 호르몬 때문에 내가 내가 아니었고.”
“…응, 그 기분 알아.”
“근데 지금 너 보니까… 나도 다시 뭔가 시작하고 싶다.”
“이 밤이 끝나기 전에, 한 번만 더 미쳐볼래?”
“노래방?”
“Go!”
우린 새벽까지 BTS 노래를 부르며 울고, 웃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서로의 지친 마음을 다독였다.
다음 날 아침, 눈은 퀭하고 머리는 지끈거렸지만 속은 이상하게 맑았다.
클레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린 참 좋은 여자들이야. 그동안 너무 잊고 살았던 것 같아.”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맞아. 나도 나를 너무 오래 방치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