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은 정조가 배봉산에 안치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현륭원)으로 옮기면서 제사를 지낼 명분으로 지었다. 아울러 새 도시 건설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정조의 개혁정신이 밴 곳이기도 하다. 1794년(정조 18) 2월에 축성을 시작하여 불과 2년 반만인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이렇게 빨리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을 등용하여 거중기, 녹로 등 새 장비를 도입함으로써 공사기간을 줄인 덕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훼손된 곳이 많았다. 다행히도 축성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대로 잘 복원되어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 왼쪽 길로 나서니 제일 먼저 반차도가 나타났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궁을 떠나 화성으로 이동하던 과정을 복사본 형태로 바닥돌에 새겨 놓은 것이다. 반차도 옆으로 행궁동 공방거리가 이어졌다. 시간이 넉넉하면 공방에 들러 공예품을 구경하고 공예체험도 해보면 좋겠다. 공방거리 초입에 여기가 ‘여민길’ 임을 알려주는 예쁜 벽화가 눈길을 끈다. 백성과 함께 기쁨을 나누겠다는 정조의 ‘여민동락(與民同樂)’ 정신을 예술가들이 벽화로 그려놓은 것이다.
공방거리를 빠져나오니 번화한 도로 중간에 숭례문보다 큰 팔달문이 보였다.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문으로 정조대왕이 현륭원을 가기위해 통과한 문이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의 의미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에 보물 120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속에서 파손되었던 수원화성은 대부분 복원되었는데, 팔달문 일부 구간은 시장과 도로로 쓰이고 있어서 아쉽게도 아직 미복원 상태다.
팔달산 입구부터 오르막 성곽길이 시작되었다. 붉게 산화된 옛 돌과 복원하느라 최근에 새로 쌓은 돌이 섞인 성곽길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성곽길 중간중간에 치성, 포루, 암문 등이 번갈아 나타났다. 서남암문을 지나자 오르막길이 끝나고 위풍당당한 서장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야가 탁 트인 서장대에 올라 멀리 펼쳐진 수원 시가지를 내려다보니 꽉 막혔던 마음이 뻥 뚫리는 듯했다.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은 시원한 바람결에 자취를 감췄고, 꽤나 힘들었던 육체의 피로가 한 번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서장대는 평시에는 군사훈련, 전시에는 지휘소로 사용되는 곳인데, 정조대왕 친필 모사본 현판과 시문이 걸려있었다. 시문은 정조가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한 후 느꼈던 감회를 적은 것이다.
서장대를 내려와 서암문을 통해 성곽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노송 숲이 이어졌고, 화서공원까지 하늘하늘 파도치는 억새밭도 나타났다. 가을 정취를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풍경이었다. 서족 대문인 화서문과 최초로 만들었다는 서북공심돈(망루 역할)을 지나 도심 사이로 난 성곽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웅장한 장안문에 도착했다. 수원화성의 정문이자 북문인 장안문은 하나의 홍예문(虹霓門)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 쪽으로 반원형 옹성(甕城)을 갖추었다.
장안문에서 5분 남짓 걸으니 7개의 수문을 갖춘 아름다운 화홍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량(水量)이 많지는 않았는데, 7개의 수문에서 내뿜는 세찬 물길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졌다. 바로 옆 방화수류정 담벼락에 놓인 디딤돌에 올라서니 용틀임하는 용연이 내려다보였다. 연못가로 내려가 연잎 가득한 용연 앞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의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 그 자체였다. 화가처럼 멋지게 그려보고 싶은 풍광이었다.
화홍문을 지나 시내로 들어서니 통닭거리에서 축제가 한창이었다. 한 잔의 맥주와 통닭구이로 노곤했던 두 다리를 달래면서 아름다운 수원화성 성곽길을 다시 그려보았다. 독창적인 축성기술로 쌓은 5.7km의 수원화성 성곽길은 예스러움과 자연의 숲길을 한꺼번에 맛보기에 더없이 좋은 둘레길이다. 큰 힘 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어서 온 가족이 함께 걷기에도 무리가 없는 곳이다. 옛 성벽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과거와 현재가 균형 있게 공존하는 이 멋진 수원화성을 그동안 와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이제라도 찾아와 보았으니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