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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스파 Mar 15. 2024

'을'이 '갑'이 되는 순간

“집에서 좀 더 해야 하지 않겄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답한거다?”

“네.........”

늘 이런 식의 대화로 조금 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갖곤 한다.   

  

이 녀석은 학원 다니면서 말썽 한 번 일으킨 적이 없고 집에서는 착한 아들, 순한 동생인데다 얼굴도 꽤나 잘 생겼다. 모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착한 아이인데, 정말 공부를 심하게 안한다는 게 늘 상담의 주제가 되는 아이였다. 


상담에서는 늘 열심히 잘 하겠다고 다짐하기에 한 번 더 믿어보자 생각하지만 그 믿음은 나중도 아니고 바로 다음 시간에 깨져서 또 똑같은 얘기를 해야 하나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자고 그 나머지의 절반은 게임을 하는 바쁜 일정으로, 수업 시작 시간에 오지 않으면 ‘또 자는겨? 너 그러다 숲속의 공주 되겄어’ 라는 문자를 주기적으로 보내야 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어느덧 고2가 되어 이제 원장인 나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한 어느 날,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다시 한 번 불렀다.      


“네가 공부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일반고에 갔을 텐데, 그게 힘들면 지금부터라도 조금 더 관심 있게 도전해 볼만한 일들을 열심히 찾아야 하지 않겄냐?”

“공부해야죠........”

“그 말만 내가 5년째 듣고 있는디?”

(서로 피식)     


“어머니는 요즘에 별일 없이 잘 지내고 계시지?”

“네”

“어머니가 가끔 너한테 카드 주지 않으시고 직접 오셔서 결제하시는 경우 있잖냐?

 근데 보통 어머님들이 오시면 궁금하신 것 여러 가지를 물어보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들 잘하고 있냐는 평범한 질문이라도 하시는데, OO이 어머님은 아무것도 안 물어보셔.... 왜 그러신거 같어?“

“.............”

“난 이유를 아는데......”     


“엄마는 겁나서 그러신겨. 네가 어떻게 하는지 너무나 뻔히 알고 계신데 그걸 내 입으로 확인받는 게 그게 두려우신겨 이눔아.     


네가 편의점에 가서 물건을 사면, 사장님은 그 돈으로 자식 학비도 대고 맛있는 음식도 해먹고 그렇게 가족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니까 너 같은 손님 한 명 한 명이 무척 소중할껴. 굳이 따지자면 네가 갑이고 사장님이 을이 되는 건데, 학원도 마찬가지로 부모님들께서 주신 수업료로 나와 내 가족이 생활을 하니까 엄마가 갑이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는 을이 되는겨. 그런데 OO이네는 내가 갑이고 엄마가 을이여.


너무나 궁금하실 텐데도 묻지 못하시고, 혹시나 학원에서 내보내진 않을까 전전긍긍 하시는 어머니가 ‘을’ 맞잖어?      


그런데 OO아..... 나는 을이 되고 싶어. 어머니가 내 눈치를 보시는 게 아니라 내가 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을이 되고 싶어. 어머니를 갑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밖에 없어.“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밖에 나가면 아저씨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고2 남학생의 눈에서 오랜만에 흘렸을 눈물이 주루륵....     


이후에 아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어머니를 갑으로 만들어 드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되었고, 다행히 수능을 치르는 날까지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착하고 성실한 아이가 되었다. 


고3 초반에 상담을 하면서 어떤 분야의 공부를 할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얘기를 나누다 군인이 되고 싶다는 말에 대학 학군장교를 도전해 보자 계획을 세웠고 다행히 금년에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몇 년 뒤, 반짝이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자기의 꿈을 이뤄낸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고, 아울러 잘난 아들의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뻐하실 어머님의 모습도 보고 싶다.      


(어머니를 갑으로 만들어 드린 아들에게 박수를 보냄과 동시에, 앞으로 갑의 삶만 사시게 될 어머님께 그동안 고생 많으셨고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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