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서랍장이 또 내려앉았다.
딱히 무거운 내용물도 없는데 수시로 내려앉는 걸 보니 이 집에서 오래 살긴 했나 부다.
서랍장의 구조가 고정된 피스를 위에서 걸도록 하면 튼튼할 텐데, 왜 이 서랍장은 아래에서 피스에 고정되도록 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원래 붙박이로 있던 서랍장이기 때문에 불평을 한들 뭣하겠나. 드라이버로 피스를 풀어 아래쪽 장치를 밀어 올린 후 단단하게 고정시키곤 A/S 끝.
막내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서랍장을 한 번 열어보고 “야~~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아빠는 어떻게 그걸 금방 고쳐요?” 경이로운 눈으로 아빠를 쳐다보고 다시 엄마에게 가서 “아빠 진짜 대단하지 않아요?”라고 엄마의 동의를 구한다.
“으이그 저 여수떼기” 엄마는 막내가 아빠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다 생각하는 것 같다.
큰 아이 운동화 안쪽 뒷굽 부분이 험하게 신어서인지 헤져서 구멍이 났다.
그러다보니 안에 있는 딱딱한 물체가 밖으로 튀어나와서 덩달아 양말도 구멍이 났다.
그 운동화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래도 계속 신겠다는 아들의 얘기에 어떻게 고쳐줄까 고민하다가 겨울에 바람막이용으로 창문 틈에 붙였던 스펀지 소재 문풍지를 과감하게 절단해 구멍 난 부위에 붙여주었다.
또 다시 막내아들이 등장하여 똑같은 멘트로 놀라운 아빠의 기술을 찬양해준다.
뭐만 고장 나면 아빠가 다 고쳐줄 것이라 생각하는 막내다.
책상이든 선풍기든 가방이든 신기하게 손을 대면 어떻게 해서든 고쳐지긴 해서 나도 딱히 부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막내가 어릴 적에는 저 놈도 크면 저런 말 안하겠지 싶었는데, 내년에 고등학생이 되는 시커먼 청소년이 됐음에도 아직도 아빠를 경이롭게 바라봐주는 막내가 참 좋다.
심지어는 내 키에 몸무게는 나보다 20키로는 더 나가는 건장한 아이임에도 여전히 아빠를 히어로로 생각해주는 아들이어서 내가 늙어간다는 생각을 덜 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새벽에 넷플릭스로 영화 한 편 보고 있노라면 잠이 안 온다며 나와서 주저 없이 아빠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눕는 아들이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겨주면 1분도 안 되서 잠들어버리는, 아직은 아빠의 손길이 필요한 아들이어서 너무 좋다.
요즘에는 무언가 고치거나 꾸미거나 손길이 필요한 일을 할 때면 꼭 막내를 옆에 앉혀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주곤 한다. 너도 나중에 아빠가 됐을 때 너의 아이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이렇게 해줘야 한다고 얘기를 해주며 아빠 수업을 시켜주는데.....그렇게 말하고 있노라면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막내에게 아빠는 여전히 슈퍼히어로다. 뭐든지 가능하게 만드는 만능 슈퍼히어로.
그런데 나는 경제적으로도 히어로인 아빠이고 싶다.
생일에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라고 하면 아빠 눈을 피해 엄마에게 “이건 비싸서 꼭 안 해주셔도 되는데요.....소고기”라고 비밀스럽게 귀에 대고 얘기하지 않는 상황이었으면 좋겠다.
운동화가 너무 낡아서 밑창과 발바닥의 경계가 사라졌는데도 아빠한테 말하면 또 돈 쓰실까봐 말하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막내의 마음 씀씀이가 없었으면 좋겠다.
내일은 막내의 생일이다.
항상 가족의 생일 미역국은 내 담당이기에 오늘 밤에도 내일 아침 먹일 미역국을 국거리 소고기 한 팩 모두 넣어 끓이고 있다.
“아빠는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끓여요?”라고 말하며 맛있게 먹어 줄 막내를 생각하며 오늘도 무능하고 행복한 만능 히어로의 하루가 그렇게 또 지나가고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나은 하루가 될 거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