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이었는지 2학년 때였는지 교양 필수 중에서 이름이 확실치는 않지만 ‘교양국어’라는 과목이 있었다. 소설, 수필, 시 등등 글쓰기에 대한 내용으로 강의를 했었는데,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특별히 누군가를 지정해서 질문을 한다거나 시험을 어렵게 내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있었던 과목으로 기억을 한다.
다만, 하나 문제가 있었던 게 글 쓰는 과제를 주기적으로 내준다는 것이었다.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그 과제들 중에서 두 가지 주제를 기억하는데, 하나는 짧은 콩트 형식의 소설을 써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대상은 상관없으니 비평하는 글을 써보라는 것이었다.
과제가 있다는 것은 당시 놀고먹는 대학생이었던 나에게 엄청난 부담이었고, 특히나 숙제는 꼭 해가야 하는 쓸데없는 모범생 기질이 있었던 터라 노는 시간을 어떻게 쪼개서 과제를 해야 할지 늘 고민이었다.
그날도 친구들과 순대 국물에 얼큰하게 한 잔 하고 있는데,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개진 친구가 소설 과제 내일 마감인데 다 썼냐고 물어왔다. 아이고야...... 이런......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늦은 시간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들어와 어차피 쓸 거면서 쓰냐 마냐를 한참 고민하다 원고지를 올려놓고 펜을 들었다. 그런데 종이와 펜만 있다고 그게 써질 리 만무했다. 어떤 주인공이 어떤 상황에 어떻게 휘말려서 결론에 도달해야 할지 막막했다.
가만히 누워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사랑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그야말로 머리로 소설을 썼다. 당시에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어서 우선은 나와 그 아이의 실명으로 두 주인공을 정해야겠다 결정하고 드디어 이야깃거리를 생각해내어 곧바로 원고지에 생각을 옮기기 시작했다.
소설 제목은 ‘그 애와 나는 말이죠...’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대학생이었던 남자 주인공 A는 시험 기간 밤에 깨워달라는 친구의 부탁으로 자정이 가까운 시간 전화를 하게 되는데, 전화번호 끝자리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다른 집에 전화를 걸게 되었고, 그때 여주인공 B가 전화를 받게 된다.(30년 전이기 때문에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음)
다음 날 B의 목소리가 유독 뇌리에 남아있던 A는 같은 시간에, 이번에는 일부러 전화번호를 다르게 눌러 B와 통화를 하게 된다. 그리고선, 친구의 부탁으로 전화를 걸게 된 사연과 연속되는 실수에 사과를 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B와 조금 더 긴 대화를 나누게 된다.
두 번째 전화를 끊으며 다음 날도 전화를 해도 되는지 물었고, B도 흔쾌히 승낙을 한다. 이렇게 두 사람의 얘기는 시작되고, 중간에 이러쿵저러쿵 작은 사건들이 있은 후에 부쩍 가까운 사이가 되는데, 그렇다 보니 당연스레 남자는 여자를 실제로 만나길 원했지만 여자는 번번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을 했다.
그렇게 서로를 목소리로만 알아가던 두 사람은 이윽고 여자의 결심으로 1년 반 만에 만나게 된다.
만나는 날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동네의 오래되고 긴 골목 양쪽에 서로 서 있기로 하였고, 남자는 평소 입지 않던 댄디한 양복에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기다렸다.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나서 골목 반대쪽에 희미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고 드디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B를 A는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A는 그동안 왜 그렇게 자신과 만나는 것을 B가 피했었는지 그녀를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B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내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물론, 그 뒤로 더 써넣은 결론은 해피엔딩이었다. 나와 여자 친구를 주인공으로 했는데 새드엔딩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과제를 제출한 그다음 주 교양국어 시간, 교수님께서 제출한 소설 중 가장 작품성이 있는 하나를 골랐다시며 수업시간에 전체 내용을 읽어주셨다.
내 소설이었다.
친구들은 내 여자 친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설 속 두 주인공 이름이 나오는 순간 박장대소 오글오글 난리도 아니었고, 나는 안 그래도 큰 얼굴을 어떻게 가려야 할지 당황하고 창피해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쓴 소설이 아니라 볼펜으로 원고지에 쓴 내용이었기 때문에 교수님께 낸 과제가 유일한 소설 본이었던지라 부탁을 드려 한 부를 복사해 집으로 가져왔다. 가장 잘 쓴 소설이라고 하니 나름 어깨에 힘주며 나중에 쓸 일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곤 곧바로 쓸 일이 생겼다.
그날부터 하루 이틀 간격으로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복사한 소설의 원고지 뒷면에 매번 한 두장 분량으로. 여자 친구가 내 편지를 읽고 반대편에 있는 내 소설도 읽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아마도 연재소설처럼 다음이 궁금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신이 나서 한 달 정도 매일 썼던 거 같다. 여자 친구는 자기가 주인공인 소설을 이전도 이후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리라.
그 여자 친구가 지금의 와이프다.
이제는 둘 다 머리가 희꿋해져서 오래전 일들을 다시 꺼내 얘기하는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가끔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이 예전의 우리와 같을 때는 서로 옛일을 회상하며 이야기하곤 한다.
참, 교양국어의 두 번째 어려웠던 비평에 대한 글쓰기에서는 이러한 제목으로 글을 썼다.
‘한국 영화의 에로티시즘에 대하여’
당시에 꺼내기도 힘든 단어를 교양국어 숙제로 냈으니,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나도 간이 참 큰 놈이었다 싶다. 그리고 그 해 교양국어는 A플러스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