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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스파 Mar 22. 2024

독서로 과학고등학교 가기

8년 전, 초등학교 4학년이던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상담하면서 어머님께서는 아이가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서 그냥 다른 아이들 하는 정도만 따라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물론 실제 마음은 백 퍼센트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아이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단어와 논리적인 문장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어머니 OO이 평소에 책을 많이 읽습니까?”

“많이는 아니고 그냥 항상 책을 가까이하는 편이긴 해요.”

“요즘 애들처럼 집에서 TV나 핸드폰을 많이 보거나 그러진 않나 보죠?”

"저희 집에 TV는 없고요, 아직 아이들 핸드폰은 사주지 않았어요. “

“아........”      


실제로 수업을 해보니 언어 구사력이 상담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현란했고, 개념을 한 번 설명해 보라고 하면 누가 선생님인지 모를 정도였다. 내가 몰라서 설명해 보라는 게 아닌데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무진장 노력을 하는 아이가 어찌 보면 참 신기하기도 했다.    

 

몇 달 뒤, 어머님이 결제를 하러 오셨길래

“어머니 OO이 나중에 본인이 뜻이 있다면, 과고에 한 번 보내보시는 게 어떠세요?”

“아이고 무슨 요, 지금 하는 걸로 봐서는 일반고 가는 것도 감지덕진 데요.”     


실제로 아이의 수학실력은 평범했다. 적당하게 맞고 적당하게 틀리고.

그런데 학원에 오면 수업 전까지 책 읽고, 쉬는 시간에 책 읽고, 수업 후에도 책 읽고, 남는 자투리 시간엔 온통 책만 읽는 아이여서 내 눈엔 현재의 실력보다 나중의 실력이 확연히 보이는 푸릇푸릇한 새싹처럼 보였다.  

   

6학년이었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근심 가득 표정으로 학원에 오셨다.

“방금 OO이 담임선생님을 뵙고 왔는데, 얘가 쓸데없이 너무 고집이 세다고 그러시네요. 국어시간에 시를 공부하면서 어떤 구절이 실제로는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지에 대해 설명해 줬는데 OO이가 계속 자기는 그런 뜻으로 안 들린다고 그러더래요. 선생님께서 ‘아니다 작가는 이런 의미로 쓴 거다’라고 반복해서 얘기를 해도 굽히지 않더래요. 얘를 어떻게 하면 좋죠?”


“어머니 제가 OO이 4학년 때 과고에 보내자고 했었잖아요? 어머님 말씀 듣고 나니까 더욱더 그런 생각이 확실해지네요. 작가가 어떤 의미로 그걸 썼든 판단하는 건 독자잖아요. 그렇게 안 들리는 걸 그렇게 들으라고 하는 게 사실 좀 웃기고요, 선생님의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고 얘기할 수 있는 OO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행복하시겠어요.”


“원장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얘 이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중등과정에 들어가면서 이 친구는 선생님께 질문을 잘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모르는 문제는 끝까지 본인이 풀어보려고 하기 때문이었는데, 가끔은 학원에서 풀지 못했지만 스스로 꼭 풀어보고 싶은 문제인 경우 설명해 주시려는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그 한 문제를 들고 집으로 가는 친구였다.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논리적으로 맞는 과정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아이였고, 여기에 더해 틀려도 전혀 상심하지 않는다는 것이 큰 장점인 아이였다. 쉬운 문제든 어려운 문제든 오답이 나오면 ‘다시 풀면 되죠 뭐’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연필을 드는 회복탄력성이 최고인 친구가 되어 있었다.     


중3이 되어 집이나 학교, 다른 학원 그리고 주변 어느 누구도 과학 고등학교를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내가 무조건 지원해 보자고 했다. 물론, 그 아이가 가고 싶다고 얘기했기 때문이었는데, 다들 안 될 거라고 얘기하는 통에 아이는 스스로 자긴 과고에 갈 만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과고가 더 이상 목표가 아닌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낙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넌 무조건 된다. 원장님이 4학년 때부터 알아봤어. 대신 지금부턴 네 시간을 조금 더 할애해서 준비를 해보자.     

그로부터 7개월 뒤,

‘원장님 저 됐어요!!’

합격자 발표 날 기다리던 카톡이 날아들었다.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선 

“거봐 인마 내가 될 거라고 했잖아, 다른 놈 다 안 돼도 너는 돼 너는.”  

   

과고 2학년이 된 지금도 학교 시험만 끝나면 학원에 찾아와서 망했다, 몇 등급이다, 이번엔 올랐다 등등 그동안의 얘기들을 한바탕 쭉 펼치고 간다. 사실 당시 수학 실력으로만 보면 다른 친구들에 비해 밀린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내가 너무 자신만만해하는 건 아닌지, 혹시라도 나중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았었다. 

독서로 외고를 가는 게 아니라 과고를 가라고 하는 게 제정신이라면 어디 누가 믿을법한 이야기던가? 물론, 그 아이에겐 이런 고민을 한 번도 얘기하거나 내비친 적은 없었다. 그 당시엔 잔말 말고 의심 말고 무조건 고고싱이었다.     


그리고 최근, 다음 해에 과고에 간 아이에게서 OO 이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겉모습만 보면 악당 쪽에 가까운 인상인지라 이 놈 분명히 화려한 말발로 누군가의 인생에 스며들었구나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왕 여자 친구가 생겼으니 다음에 오면 사랑을 책으로 배우서 행동하는 지질한 남자가 되지 않도록 사랑학개론에 대해 일장 연설 한 번 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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