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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스파 Apr 10. 2024

한화이글스 관세음보살 팬

지면 욕하고 다음 날 또 응원을 하고 있다.

연패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헛웃음 지으며 카운팅 하지만 그럼에도 또 응원을 한다.


보살 팬이라고 해서 져도 좋은 건 아니다.

연고팀이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하며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 위로하며 살지도 않는다.

그저 모두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려 어제의 일을 아주 잠시 잊고 오늘에 충실할 뿐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당시 나는 국민학생이었다.

그때에는 고교야구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던 상황이어서 프로야구란 타이틀이 관심 있게 다가오진 않았었는데, 군인이셨던 아버지가 사 오신 컬러 TV로, ‘서울의 봄’ 영화 주인공이 시구를 했었고 MBC청룡이 연장전 만루 홈런으로 짜릿한 승리를 했었던 개막 경기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우리 연고팀은 OB베어스였다. 

    

나는 동네에 있는 높지 않은 산 밑에서 살았었는데,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산 주변에는 늘 무당집들이 많았었고 우리 집 지하층에도 무당이 살고 있었다.

흐릿한 기억에 희고 빨간 깃발과 사주, 관상, 작명과 같은 단어들이 붙어 있었는데, 왠지 모를 두려움이 있어서 한 번도 지하로 내려가 본 적은 없었지만 그 집 이름이 ‘여해 철학관’이었던 기억은 있다.    

 

어느 날 철학관에서 종이 쓰레기를 잔뜩 밖에 꺼내 놓았다. 무슨 종이인지 발로 툭툭 차 보다가 당시에 조금 유명했던 어른들 잡지가 눈에 띄었다. 

횡재였다.

얼른 잡지를 보이지 않게 허리춤에 꽂아 넣고선 후다닥 집으로 올라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떨리는 마음으로 열어 보았는데, 이건 뭐 글자와 기생충 포스터처럼 눈 가린 흑백 사진들만 잔뜩 있고 내심 바라던 그 어떤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잡지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생뚱맞게도 OB베어스 어린이 회원 모집 광고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어른 잡지에 어린이 회원 모집 광고가 있었는지 조금 의아하긴 하다.


아무튼 그 광고엔 부착된 엽서를 보내면 추첨을 통해 어린이 회원이 될 수 있다는 내용과 더불어 당첨된 회원에게는 OB베어스 기념품까지 준다고 되어 있었다. 엽서는 별도의 우표 없이 우체통에 넣기만 하면 된다고 하기에 간단한 인적사항을 써서 집 근처에 있던 빨간 우체통에 넣었고 얼마 뒤에 놀랍게도 어린이 회원에 당첨되었다며 나에겐 맞지도 않는 쪼그만 유니폼과 들어가지 않는 모자, 그리고 선수들 사진이 프린트된 카드가 집에 도착했다.     


그 이후로 나는 완벽한 OB베어스의 팬이 되었다. 

받은 게 있어서 돌려주려는 마음은 아니었고, 작아서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옷과 푸바오에 모자를 씌운 것 같은 엉성함으로 만져보기만 한 모자, 그리고 카드까지 항상 방에 널브러져 있어서 그냥 친근했었던 것 같다. 

어느 날엔 선수들이 모 호텔에 묵는다는 얘기를 듣고 친구와 무작정 호텔 앞으로 갔다가 OB베어스가 아니라 롯데자이언츠 선수들이 묵는다는 소식에 당시 엄청나게 유명했던 김용희 선수의 사인을 받아서 온 배신의 하루도 있었다.    

 

하지만 1985년, 내가 했던 배신은 배신 축에도 끼지 못하게 OB가 연고지를 서울로 옮겼고, 난 아끼던 선수들 카드를 모두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다음 해에 내 헛헛한 마음의 빈자리를 빙그레이글스가 채워주었는데 지금까지도 오로지 나에겐 여전히 우리를 배신하지 않은 이글스가 전부이며, 현재는 세 명의 지지 세력을 더 모아 온 가족 네 명이 열렬한 팬으로 살고 있다.      


금년엔 1위 자리에 한화이글스 이름이 올라가는 놀랍고도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든 그 자리에서 내려와도 괜찮다.

보살 팬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글스 팬이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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