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원장전
고등학교 때부터 머리에 새치가 좀 있다 싶었는데, 나이 들면서 점점 많아지더니 이제는 검은 머리를 찾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회사 생활을 할 때에는 아무래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잦아서 염색을 하곤 했었는데, 자영업을 시작하면서는 굳이 염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있는 색깔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가끔 상담하러 오시는 어머님들께서.
“전화 목소리로는 굉장히 젊으신 줄 알았는데......”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뭐 뒷말은 듣지 않아도 실물은 늙었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눈썹도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얀 눈썹은 검은 눈썹과 비교하면 성장이 남달라서 자라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 요놈은 자라고 자라 중원을 평정했던 고령의 무림고수 눈썹처럼 위로 위로 끝없이 올라갈 기세로 성장한다.
수염은 또 왜 이런가?
휴일에는 면도를 하지 않는데, 일 년에 두 번 학원방학이라도 하는 경우엔 휴일이 길어져 수염이 덥수룩해진다. 그런데 콧수염은 괜찮지만 턱수염은 모조리 하얗다. 검은 가운데 하얀 것이 아니라 아예 검은색을 찾을 수가 없다.
열심히 살아온 세월의 증표라고 긍정적으로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또래에 비하면 너무 차이가 나는 외형인지라 ‘염색을 해버릴까 “’ 생각했다가도 산신령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그리고 학원에 오는 아이들이 놀랄까 싶어 그냥 맘 편히 외모는 잊고 살고 있다.
다만, 처음 보는 분들이 집사람과 내가 동갑이라는 사실에 매우 놀라며 집사람에게 동안이라 칭찬할 때 염색에 대한 욕구를 느끼곤 했는데, 집사람은 내가 봐도 정말 동안인지라 염색의 유무가 결과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아내와 10년은 늙어 보이는 남편이 동갑이란 말을 누가 믿기겠는가.
염색의 유혹을 가장 강하게 느꼈을 때는 막내가 초등학생이던 10여 년 전이었는데,
마침 시간이 맞아 하교하는 막내와 손 붙잡고 집에 왔는데, 다음 날 친구들이 할아버지냐며 물어보더란다.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백발은 아니었는데, 뒷모습만 봤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다 싶으면서도 아빠를 아빠라 자랑스럽게 얘기하기 힘들었을 막내 생각에 이 참에 확 바꿔버릴까 고민을 했었다.
물론, 결론은 같았지만....
요즘엔 흰 눈썹이 높은 음자리표처럼 자꾸 돌돌 말리며 위로 올라가서, 조금 깎아서 주변 눈썹과 길이를 맞춰준 다음 쓱쓱 문지르면 순간 까맣게 염색되는 화장품 비슷한 물건으로 살짝 색칠을 하고 있다.
세수 한 번 하면 갈색, 두 번하면 다시 흰색으로 돌아오긴 하지만, 잠깐의 까만 눈썹이 그렇게 어색하진 않다.
그런데, 이름은 모르지만 두꺼운 사인펜 같은 모양으로 까맣게 염색해 주는 이 물건은 왜 집에 있는 걸까?
나는 지금까지 집사람이 염색하러 간다고 할 때마다 진짜로 머리색을 예쁘게 바꾸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고 집사람도 벌써 오래전부터 긴 머리 안쪽부터 흰머리가 죽죽 자라나고 있어서 보기 흉해 정기적으로 염색을 했던 거란다.
그리고 그 물건은 가끔 임시방편으로 쓰기 위해 사두었던 것이고, 내가 처음 사용한 날 거의 다 써서 잘 나오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동안 꽤 사용했었구나 싶었다.
큰 아이가 이제 20대 중반으로 들어섰고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오래 만난 여자 친구도 있으니, 머지않아 진짜 할아버지가 되는 날이 오겠다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그동안 ‘할아버지’란 단어에 쌓인 내공이 있으니 그것이 현실이 되어도 지나버린 세월 아쉬워하며 흔들리지는 않으리라.
(장담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