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튼 아카데미> 리뷰
제도를 신뢰할 수 없을 때 제도에 반발한다.
모든 고등학생이 대입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예중, 예고, 미대 총 세 종류의 입시를 치르는 동안 참 즐거웠어요. 기성세대가 만든 제도 안에서 보호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도, 제한 시간 내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시험을 치르며 느끼는 압박감도 좋았습니다. 당시 한국미술교육계는 제가 수상과 합격이라는 문을 통과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인생의 긴 시간 동안 제도에 반발하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내가 어디에 속하고 싶은지 다소 이른 나이에 결정했고, 그 집단에서 거부당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미술 대학에 다니면서는, 제가 앞으로 진입할 한국 현대미술계가 바보처럼 느껴졌습니다. 신뢰가 생기질 않았습니다. 이렇다 할 평가 기준이 없어 보였거든요. 아직도 남아있는 재능신화, 예술신화가 제도 비판에 주력하는 아방가르드와 순수 미술, 포스트모던한 기류와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 장르를 애매하게 조합한 데에 그치는 작업들도 많았습니다. 사랑받는 대중 장르에 대한 피해의식, 관념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불친절함도 싫었습니다. 관객과의 소통에 대한 노력이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소비자가 곧 생산자인 동네 잔치에서 피드백을 나누기 위해 작품을 제작하긴 싫었습니다. 예중 예고를 통해 ‘예술 엘리트’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정작 대학에 입학한 후 의지를 잃고 미술계에서 빠져나가는 경향도, 병든 현대미술계를 반증한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이 씬에 진입하기도 전에 빠져나왔기 때문에 명확한 현황을 알지 못하고 내린, 직관적이며 비관적인 판단입니다. 그런 개인의 한 시각일 뿐이라는 점을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이에 대해 열심히 고민하며 시리즈물을 쓰는 중입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현대미술계의 히피적인 분위기와 안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짐작보다 훨씬 더 소통 욕구가 컸던 거죠. 메시지를 더 실감 나게, 길게 전달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졸업 후, 드라마 업계로 탈출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선 난생처음 자본주의를 실감했습니다. 현대미술계는 그에 비하면 진실한 히피 집단처럼 느껴졌고요. 드라마 업계는 기존 흥행작들로 잡탕을 끓여 끊임없이 아류작을 재생산하는 듯 보였다. 많은 한국 드라마들은 여전히 할리우드식 작법, 항상 말싸움을 걸어대는 로맨틱 코미디의 차도남, 2000년대 드라마 속 뻔한 휴머니즘을 그저 답습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 코드를 충실히 재현하지 않은 대본은 이해하길 어려워했습니다. 그러니 그 시스템이 공모전 지원자들이나 신인 작가들의 개성과 창작 의지를 꺾고, 히트작을 비슷하게 베끼게 만들고, 기획PD들은 또 드라마 작가들에겐 창의력이 없다며 다른 분야에서 IP를 가져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느꼈습니다. 스타 작가 시대가 저물었다며 전문성 즉 ‘당사자성’이 있는 외부의 작가에 기댈 것이 아니라 드라마만의 작가팀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고용하는 방식이나 작품을 개발하는 방식, 공모전 등도 문제적이라고 느꼈고요. 누군가의 눈엔 데뷔하지 못한 자의 피해의식으로 비칠 것도 같으며, 그게 맞을 수 있습니다. 신선한 시리즈물들이 적지만 꾸준히 제작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제도로부터 거부당하거나, 그 제도가 내세우는 가치가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 그 제도에 반발합니다. 수동적으로든, 공격적으로든. <바튼 아카데미> 속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노스탤지어적 인테리어로 전락한 시대 배경, 푸념에 그치는 제도 비판
1970년, 미국 동부 보딩스쿨에 다니는 남학생은 어떤 점에 불만을 품었을까요? 1970년은 사회적 격변기였습니다.
① 베트남전과 징병제 ② 68혁명으로 인한 자유주의, 개인주의의 유행 ③ 고전 교육에 대한 답답함. ④ 대입 제도 ⑤ 기여 입학제로 약속된 대학 합격증 ⑥ 마초적 학풍
하지만 ‘졸업 직전 학기의 방학’을 보내는 <바튼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어떤 고민을 하는 중인 건지 모르게, 퍽 평화로워 보입니다. 대다수가 부모 재력을 통해 대학입학을 보장받았고, 이 부모들은 방학식 예배에 함께 참여할 정도의 ‘헬리콥터 맘’들입니다. 학생들은 주입식 교육이 아닌 고전 교육을 받고, 한두 문제 차이로 등급이 갈릴 걱정 없는 에세이식 시험으로 내신을 산출 받습니다. 기숙사 벽에 포스터를 붙이고, 머리도 기르며 (한국인과 몰몬교도 학생은 머리가 짧다.) 취향을 표현하고 소극적 반항도 해보죠. 대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학생들은 고3이지만 방학 때 영국 식민지 섬나라로의 여행을 꿈꿉니다. 이들이 걱정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군사학교 입학이죠. 군사학교는 실제 군 조직이 아니며, 학생들은 베트남전에 징병 되지 않습니다.
하버드 출신 선생님은 젊은 시절부터 쭉 출신고에서 고전을 가르칩니다. 지난해 지역 유지의 자제가 코넬에 입학하는 것을 좌절시켰으나 그 때문에 잘리지도 않았고요. 학생들은 시험 성적과 빡빡한 수업 일정에 항의하지만, 교권을 침해당할 정도는 아닙니다. 선생님은 습관적으로 졸업생과 재학생들을 까 내립니다. 급식 조리사를 상대로도요. 방학 때 당직을 맡으면선 위스키를 마시고 학생들을 지도합니다.
저는 이들이, 어디에도 당사자로서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1970년을 살아가는 실제 인물로서도 그렇고,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도 그렇습니다. 감독이 등장인물의 운신의 폭을 좁혀 놓은 것 같아요. 자전적 이야기를 쓰려는 예술가에게 으레 경고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자신이 겪은 삶이 이미 너무나 진실이라서, 사건을 다각도에서 보지 못하기도 하고, 자신을 재현한 인물을 정해진 답에 가둔다.’는 겁니다. 크게 동의하진 않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로 남의 눈물을 짜내려는 감독은 오히려 소수고, 훌륭한 자전적 이야기를 만들어낸 감독들이 이미 많으니까요. 하지만, <바튼 아카데미>는 마치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백인 남성이 쓴 자조적인 일기장 같습니다. (감독 알렉산더 페인에 대한 정보 없이 보았다.) 그는 첫째로, 자조와 비난으로 죄책감을 덜거나, 자신의 PC한 인식을 보여주는 데에 단조로운 이야기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며 둘째, 베트남전에 징집되어 전사한 ‘커티스’같은 당사자를 극의 핵심 인물로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극 중에서 폴은 자꾸 다른 인물을 훈계하고 비꼽니다. 논문을 마무리하거나, 책을 쓰거나, 학생들을 사회 참여적 지성인으로 키워내는 교육은 꿈으로 남길 뿐이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인물은 쉽게 비호감이 됩니다. 하지만 감독 자신을 투영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감독은 굳이 캐릭터를 호감형으로 꾸미지 못합니다. (노아 바움백의 자전적 영화 <결혼 이야기>에서도 남편은 아내보다 괴팍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이런 비판들도 거의 폴의 대사로만 전달됩니다. 공동 주인공 앵거스 털리는 몇 번 친구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교정해주긴 하지만, 속으로 어떤 고민을 하는지 후반부 전까진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스워스모어 대학에 붙을 정도로 영특했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소집영장을 학생 유예하지 못하고 비인도적 전쟁에 참여해 전사한 흑인’ 커티스라는 인물이 활용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스워스모어는 리버럴아츠 칼리지 중에 가장 입학이 어려운 대학이며 재정과 교육 수준 면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소수 정예 명문 대학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커티스의 사망이 학교구성원들에 큰 상처를 남겨서 어떤 변화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아닙니다. 앵거스나 폴은 커티스와 거의 관련이 없어요. 앵거스는 약간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앵거스와 메리와 단둘이 대화하거나 앵거스가 커티스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영화가 메리의 슬픔과 그 극복과정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폴과 앵거스가 각각의 개인적인 고민에 몰입해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합니다. 이들은 제도의 수혜자이고 제도를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시니컬한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연민하며 드라마적 감정에 젖을 수 없는 것이죠. 감독은 그렇기에 그 둘의 운신의 폭을 좁혔습니다. 이런 태도가 비겁하게 느껴졌어요.
그런 점에서 반대로 <죽은 시인의 사회>는 꽤 훌륭한 영화입니다. 키팅 선생님은 현행 교육과정에 불만을 갖고, 직접 행동주의(?) 수업을 합니다. 학생들은 그에 동요하여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그들만의 동아리를 만들고, 키팅이 쫓겨난 후에 수업을 거부합니다. 닐은 진로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하다가 권총 자살을 합니다. 키팅은 자기의 신념을 따르는 교육자고, 그를 통해 학생들은 변화하려 하죠. 또,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1980년대 초반, 영국 북부지방의 한 공립 고등학교 대학입시 준비반. 시험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며 ‘인생을 위한 수업’을 하는 낭만적인 문학교사 헥터와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고용된 젊고 비판적인 옥스퍼드 출신의 역사 교사 어윈 사이에서 학생들은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그 대비를 즐기며 그들 나름의 기준을 찾으려 한다.-노네임 씨어터)는 대립적인 가치관을 가진 교사 둘을 등장시켜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당사자가 못 되는 비겁한 자신에 수치를 느끼는 심리를 다루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주로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되며, 사건의 당사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서술이 주가 됩니다.
“인마, 넌 머저리 병신이다. 알았어?” (중략) 나의 아픔은 어디서 온 것일까. 혜인의 말처럼 형은 6·25의 전상자이지만, 아픔만이 있고 그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나의 환부는 어디인가. 혜인은 아픔이 오는 곳이 없으면 아픔도 없어야 할 것처럼 말했지만, 그렇다면 지금 나는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것인가. 나의 일은, 그 나의 화폭은 깨어진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것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시간을 망설이며 허비해야 할는지 모른다.
<병신과 머저리>(1966,이청준)
<노르웨이의 숲>(1987,무라카미 하루키)은 일본의 좌파 학생운동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는 동기들 가운데 혼자만 사회 참여를 거부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튼 아카데미>는 제삼자가 느끼는 그런 종류의 병증을 다루지도 않는 것 같아요. 사회적 배경을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인테리어로만 사용했다고 느꼈습니다.
차라리 자신만의 좁은 세상에 사는 엘리트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였다면…
차라리 <바튼 아카데미>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부유층 자제를 비판했다면 어땠을까요? <엠마>(1815,제인 오스틴)처럼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을 낮잡아보는 주인공의 심리를 보여주거나, <누가 버지니어 울프를 두려워하랴>(1983,에드워드 올비)처럼 온갖 똑똑한 척을 하며 서로를 비판하는 부부가 등장하지만 사실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회피했던 심리를 보여줬다면 어땠을까요?
이 밖에도 <바튼 아카데미> 속에서 활용될 만한 쟁점들은 많습니다. '보딩 스쿨의 아이들은 왜 공부하기 싫어할까? 부모의 재력으로 따 놓은 대학 입학증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는 걸까? 벌써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걸까? 기여 입학제는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미국 교육은 저 당시 어떤 과도기를 통과하고 있었을까? 미국 교육은 왜 고전을 중시할까? 가족 전부를 엘리트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미국은 얼마나 폐쇄적인 걸까?'
그런 많은 쟁점들을 조명하기에 <바튼 아카데미>의 캐릭터들은 충분히 다면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부터, 등장인물들은 이제는 꽤 진부한 기준으로 재단됩니다. 남모를 아픔을 가진 반항아, '찐따' 선생님을 통해 원가정에서의 갈등, 가장 근본적인 애착 관계의 결핍을 다루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인셀의 언어와 엘리트의 언어는 아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적 배경을 드러내는 데 실패한 <바튼 아카데미>는 의외의 쟁점을 던집니다. 몇몇 학생들이 별 의식 없이 장난스럽게 인종차별·성차별 발언, 혐오 발언을 하는데, 이들의 언어가 인셀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엘리트가 상대를 더욱 상처 주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서 혐오적 언어를 만들어내는 행태는 문제적입니다. 친구의 어머니에 대한 모욕적인 성 농담, 나치와 뉘른베르크 재판을 자신들의 일상적 상황에 비유하여 유머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딱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오는 것조차 아닙니다. 한 선생이 어머니가 루푸스에 걸렸다며 당직을 피해 가기도 합니다. 이는 엘리트 유머라기보다, 완급조절에 실패한 망언입니다. 동시대 한국에서 남자 대학생의 단톡방 문제나 에브리 타임의 혐오 게시글 문제가 불거지면, 이는 현재 2030인 이들 세대의 문제로 초점이 맞춰지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적 맥락에서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엘리트’ 또한 정말 공포스러운 현상입니다.
서구는 68혁명 이후 인권운동, 페미니즘 운동이 사회적으로 활성화되며 몇십 년째 다양성 정책들과 정체성 정치가 주요 화두였습니다. (출처-<정치적 부족주의>,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그 사회의 엘리트는 선벨트 지역/부유함/진보/다양성 정책 지지/코스모폴리탄이라는 지표들로 묶이는데, 이들에게 인종차별은 어려서부터 당연한 금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1970년을 사는 백인 엘리트가 자기반성을 하는 내용이 2023년 현재 그런 시청층에게 시의적절하게 다가가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소년에게 스승은 동일시의 대상이다.
안과 질환이나 트리메틸아민뇨증같은 선생님의 외면을 ‘왕눈깔’로, 사회적이지 못한 태도를 ‘루저’라고 부르며 무시하던 앵거스가 정작 폴을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폴에게 “두 루저와 비탄에 젖은 엄마잖아! 당신과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끔찍해!”라고 외치고 도망치는 앵거스는 씩 웃으며 폴을 돌아봅니다. 아이들끼리 있을 때 폴의 뒷담이 나오면 편을 들어주고요. 저 같은 한국인의 눈에, 앵거스는 또래 중에서도 키가 크고 잘생겨보이며, 누구에게 지거나 참는 성격도 아니라서 또래에게 인기가 많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앵거스는 영향력의 차원에서 폴과 자신의 차이는 미미하게 느끼고, 하버드 출신에 비관적이라는 점에서 폴에게 처음부터 동질감을 느꼈던 건가 싶습니다. 물론, 폴은 앵거스가 따를 만한 사람입니다. 폴은 마초적이거나 전형적인 남성성을 거부하는 남성입니다. 단순히 사회 부적응자나 도태된 자, 소심한 성정으로만 특정될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폴은 그 길을 따라 걷고 싶은 마음이 물씬 생겨나는 스승은 아닙니다. 저에게 참스승은 그런 이미지거든요. 기꺼이 약자의 자리로 내려오는 사람, 제삼자로 머무르지 않고 당사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모호한 비언어나 반언어가 아닌 적확한 언어로 세상의 편견들을 꿰뚫고 정정해주는 사람이요. 훌륭한 관점을 갖게 도와주는 좋은 책 처럼요. 그래서 언어적으로 유의미한 소통을 하지 않는 폴-앵거스가 좋은 사제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맥락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에도 큰 인상을 받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남학생들에겐 오래도록 폴이나 키팅 선생같은 교육법이 오히려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같이 고난을 겪으며 거기서 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고, 유대감을 느끼는 것이죠. 제자가 '캔디를 먹으라'며 선생님의 성생활과 애정 관계를 걱정해 줄 정도로 서로 격의 없습니다. 아마도 언어에 기반한 엘리트 교육이 엘리트의 관점을 치밀하게 물려주는 수단이 되었기에 이 영화에서 이런 교육을 조명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저는 앵거스와 저의 성차(저는 여성입니다.)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았습니다.
소년은 아버지처럼 살고 싶을까? 소녀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을까?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말하는 남성성은 이런 식입니다. '소년은 자라서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그를 대체하길 원한다.'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 권력 대물림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 속에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아버지는, 아내를 착취하고 지배하려 드는 성실한 가부장제의 부역자입니다. 그런 아버지들은 범죄자가 되고 말지언정, 연약한 존재로 전락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허구의 이야기 속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처치하고 아버지와 다른 나를 꾸려가는 데에 성공하지만, 현실 속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를 무찌르고 아버지의 모습을 유사하게 대체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 지점에서 <바튼 아카데미>는 그런 클리셰를 빗겨 갑니다. 앵거스의 아버지는 가족들로부터 ‘버려졌고’,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정신질환을 심하게 앓는 환자입니다. 그래서 앵거스는 누구보다 아버지를 연민하고 아끼지만, 절대 아버지처럼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어쩌면 앵거스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는 약한 존재죠. 앵거스는 ‘아버지처럼 되기’를 수치스러워(?)하며 동일시를 거부합니다. 이런 지점에서 <바튼 아카데미>는 독특합니다. 하지만 앵거스에겐 스승 폴이 있습니다. 앵거스는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거부하는 대신 앵거스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로 택하죠.
반대로 “난 엄마처럼 안 살아-”라고 외치고 가출하는 소녀는, 주로 학대 피해자 어머니 혹은 순응적인 가정주부 어머니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길 원합니다.
김희진은 귀가허가증을 끊어 언니네 자취방에 갈 때 종종 늦은 밤의 홍은동 골목을 지나쳤다. 붉은 조명이 켜진 유리 쇼윈도 아래 진한 화장을 하고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여자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또 언니의 친구들이 어떻게 고향의 어둑신한 부엌을 뛰쳐나와 고달픈 도시의 변두리에 편입되었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언니의 자취방을 떠나와 형편에 안 맞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미래에 어떤 빚을 지게 되는지도 알았다.
<빛의 과거>(은희경,2019)
보는 우리는 그 소녀를 응원하면서도 그 소녀가 아직 현실을 덜 깨달았다는 생각, 그 소원을 이루기 힘들 거라는 씁쓸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당돌하며 덜 깨우친 소녀’, ‘언젠가 세상에게 뒤통수를 맞을 소녀.’의 이미지로 말이죠. 더 나아가, 성공한 여성이 자신의 젠더를 부정하고,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마초적 태도를 체화하는 것도 꽤 흔한 심리입니다. 저도 이런저런 여성 서사를 읽으면서, 우중충하게 이어지는 여성 불행의 역사 속 당돌한 소녀가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를 대체하는 신화적인 인물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성들에겐 자신과 동일시할 더 많은 롤모델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건, 사회적 자본을 지닌 여성들이 여성 일반으로부터 자신을 선 긋고 분리해내지 않아야 가능하겠죠.
소년은 왜 자기중심적일까? 소녀는 왜 관계 중심적일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는 68혁명의 슬로건을 취하면서, 한국의 여성 서사는 ‘소녀 감성’을 비난하는 오랜 시선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소녀 감성’을 쉽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감성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즉, 사회 속 자신을 보지 못하여 자신이 특별하다는 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청소년기의 정신 상태가 지속된다는 뜻이고요. 미신도 쉽게 믿고 잘 삐지며 능력에 비해 질투가 많답니다. 관계에 집착하는 것도 이에 따른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소녀 감성’은 단순히 여성 서사의 어떤 특징을 '귀엽게' 보는 말이 아니라, 여성 비하적 수식으로 확장됩니다. 은희경 소설가는 오랜 기간 “그저 그런 연애소설은 그만!”이라는 기자의 혹평을 들었다고 하며, 여성영화가 부흥하기 시작한 2019년 즈음 <벌새> 또한 그런 식의 비난을 들었습니다.
중략) 대치동 금수저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었다고 독립영화로 징징대는 뻔함이 독보적이었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중략) 남녀 성별에 따른 선악 설정이 마블 영화급으로 작위적임. (중략) 대치동 금수저 키즈가 운동권 출신 학원 여선생에게 배운 손가락 잘린 공장 노동자의 노래 부르면서 위로 받는다는 설정은 진심 너무 역겨워서 극장에 토할 뻔 했음. 공장 노동자의 잘린 손가락 마저도 대치동 키즈의 중2병 자기연민을 달래기 위한 엿가락으로 빨아먹는 유아기 수준의 퇴행적인 자기중심성 이라니... (중략) 그 집값 비싼 대치동에서 대한민국 상위0.1%로의 삶을 영위해 놓고도, 아마 인생 유일의 고난이었을 십대 시절의 그 알량한 생채기를 나이 먹고도 징징대며 가난포르노, 피해자 코스프레로 전시하는 거 말고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는, 미성숙하고 재능 없는 한 인간이 스크린 뒤에 보였기 때문에.
(출처: 왓챠피디아 코멘트. 캡처되어 이런 저런 커뮤니티에 유포됨. 유저 닉네임을 찾지 못했습니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비판입니다. 하지만 이 유저는 <벌새>의 흥행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설령 <벌새>가 계층의식을 결여하고 있더라도, 여성 관객들은 자라서 기득권(?)이 되었을지도 모를 ‘금수저’의 자기연민이 한심하고 지겹다고 비난한 게 아니라, 여성 청소년으로 90년대를 살았던 은희에 공감했습니다. 은희의 계급이나 지역적 정체성보다 여성이라는 젠더가 강렬한 동질감과 공감을 이끌어냈죠. ‘미투 운동’을 겪어내며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자기 고백은, 정치적 도구로 취급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파급력을 내려고 기획된 스피치가 아닌,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외침일 뿐입니다. 사회적 불평등이 극복되기 전까지 그 자기 고백은 진부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소녀 감성’이라며 작품 속 문제를 축소하려 들거나, ‘페미 묻었다’며 작품의 진정성을 문제 삼는 지적들은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못하는 지적들입니다. 정치인과 달리 예술가가 할 수 있는 건 중도층 흡수나 반대 진영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솔직한 자기 고백일 것입니다.
‘소녀 감성’으로 무시당했던 여성 청소년의 특징은 뭐가 있을까요? 은희경의 여러 소설들과 <여고괴담2:메멘토 모리>를 바탕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둥글둥글한 언어로 친근감을 형성하면서도 동물적인 무리 짓기에 기민하게 반응하기, 친구의 거부와 긍정 신호를 파악하기, 질투나 서운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반언어적이고 비언어적인 소통에 집중하기, 그리고 소심하거나 수동적인 나에 대한 자책, 혐오, 주눅, 후회 등이 있을 겁니다. 물론 여자 고등학교에도 니킥으로 친구의 치아를 부러뜨리거나 술병으로 친구를 타격하는 학생들이 존재합지만, 남학생에 비해 현저히 적어서 작품 속에서 많이 다뤄지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피라미드 게임>처럼 2020년대 이후에 창작된 콘텐츠들에선 여고생의 폭력성을 소재로 하는 경향이 크게 늘었습니다.
반대로 소년들은 주로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왔을까요? 컨디션이 저조한 와중에 싸움이 붙어서 음담패설을 주고받다가, 몸싸움으로 번지고, 교사에게 벌을 받습니다. 문제아는 교사에게 대들고 서열을 구분해 동급생에게도 폭력적으로 굽니다. 높은 확률로 무뚝뚝하고 감정전달에 서툴고요. 소년들은 자신의 미성숙함과 공격성을 전면에 표출하고 숨기지 않습니다. 숨기지 못하는 게 아니라 숨기지 않는 것에 가깝죠. 그래서 남성 서사엔 ‘찌질이’와 ‘문제아’가 극단적으로 캐릭터화된 채 함께 등장합니다. 마초와 찌질이, 요즘 말로 마초는 '알파남', 찌질이는 ‘하남자’(용어가 쓰이는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에겐 서열이 자신의 자아 정체감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제아’는 자신의 공격성을, ‘찌질이’는 자신의 ‘찌질함’을 지나치게 표출합니다. <바튼 아카데미>에도 그런 소년들이 나오죠. 분명히 앵거스는 전형적인 ‘문제아’에서는 빗겨나 있습니다. 하지만 몰몬교도나 한국인같은 조연들이 표현된 방식은 또 전형적이고 단순합니다. 앵거스 캐릭터 또한 관계 중심적이지 않고 자신에만 몰입하며 무뚝뚝하다는 문제아의 스테레오타입을 답습하긴 했습니다. 영화의 초중반부, 그런 점이 몰입도를 낮춥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노스탤지어적 풍경
풍경 위로 다소 건조한 서체가 지나가는 오프닝 크레딧은 <샤이닝>을 연상시키기도 했고, 겨울 풍경 롱샷이나, 넓게 찍힌 실내에선 잉마르 베리만도 떠올랐습니다. 아름다운 실내 풍경은 마치 카드나 달력 속 그림처럼 평평하게 느껴졌고요. 다소 유치한 대사 톤과 깊이감이 적은 인물들, 산만한 구성 때문에 ‘MGM’이 1950년대 제작한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가끔씩 들려오는 통기타 음악이 그 시대 영화가 아님을 일깨웠죠.
하지만 왜 이 레트로 영화가 2023년에 만들어졌어야 했는지 의문을 해소하진 못했습니다. 이야기엔 큰 줄기가 없이 산만하고, 그렇게 벌어놓은 시간 동안 인물에 파고들지 못하고 외면만 보여주며 러닝 타임을 허비하는 이 영화를요. 레트로한 그 시절 배경을 구현하는 데에 온 힘을 쏟느라 다른 데에 심혈을 기울이지 못한 모양입니다.
2024년 8월 18일에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