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5월 23일 작성한 글입니다.
* 이 글 속'진보 세력'은 당파를 뜻하지 않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하며 문학과 X를 기반 삼아 움직이는 젊은층을 의미합니다.
* 저작권이 만료되어, 여기서 영화를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https://naver.me/5l7lUKw7
충분히 현대적인 1941년의 ‘자학 개그’
‘자학 개그’는 오늘날 진보 지식인의 교묘한 자기 방어법이다. 자신의 위치를 비판하면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식의. 프레스턴 스터전스의 영화 <설리반의 여행>은 이 구조를 이미 80여 년 전 코미디로 그려냈었다. 그러나 이 ‘자학 개그’가 그 옛날에나, 지금에나 과연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을까?
자신의 진보성을 비판하는 메타 코미디, 이런 건 확실히 아무나 하진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일단 자아 성찰부터가 쉽지 않다. 기자, 평론가, 사회학자처럼 시스템과 장르를 비판하며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이들조차도 능숙하지 못하다. 예술 분야에서도 레퍼런스가 적다. 홍상수와 <인간 실격>의 다자이 오사무가 써 내려간 일기는 솔직하긴 하지만 개그 기술이 떨어진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롭다’는 이유로 진보적이라고도 불리지만, 구습을 체화해 온 추레한 기득권에 가까워 보인다. 최근 들어 제기되어 온 진보세력의 맹점인 ‘‘자기 검열’에 대한 검열’은 ‘자학 개그’일까?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모든 여성이 스스롤 검열하게 만드는 자신’을 반성하려는 X(구 트위터) 유저들이나 <나쁜 교육>,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잘못된 단어>등의 사회학 서적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무결함의 강박에 빠진 진보세력’을 지적하는 시선들 말이다. <설리반의 여행>과 가장 닮아있는 건, ‘일침 놓는’ 계몽적 뉘앙스가 실린 이러한 주장들이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급진적인(?) 이 80년 전 영화를 동시대의 잣대로 평가해보려 한다. 진보 지식인의 ‘자학 개그’가 지니는 한계와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지적 행위인지 다음의 세 요소를 중심으로 고민해보고 싶다. ① ‘수치심’ 위주의 가난 묘사 ② 엘리트인 화자 ③ 풍자의 유효성
① ‘수치심’ 위주의 가난 묘사에서 생존의 문제로
설리반의 집사가 설리반에게 말한다. “대부분이 부자인 이론가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가난이란 뭔가 부족한 거라고요. 부가 부족하다고요. 하지만 가난은 그 자체로 유해한 것이에요.” 가난하다고 해서 어딘가 모자란 게 아니라는 뜻 같다. 하지만 이 주장과 반대로, 많은 작가들은 주구장창 가난을 인물의 치부, 약점으로 활용해 왔다.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김은숙 드라마에서 가난한 ‘설정’의 여주인공이 사람들에게 모욕당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남자주인공이 숨겨왔던 자신의 재력을 ‘서프라이즈’로 공개하는 장면도.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은 백화점 오너인 김주원의 정체를 안 후, 당황할 뿐, 그 안의 위선을 분명히 인지하진 못한다. 여성 인물에게 수치심을 주는 이런 설정은 유서가 깊다. 심지어 여성이 공주일 때에도 유효하다. 그림 형제의 <지빠귀 부리 왕>, <개구리 왕자>, <미녀와 야수>에서도 추한 존재들이, 실은 공주(혹은 여성들)보다 고귀한 신분이었음을 알려주며 그녀들의 오만함을 ‘교정’한다.
<설리반의 여행>에서도 초 중반부까진 가난이 심정과 관계의 층위에서 묘사된다. 설리반은 언제든 자신을 구출하러 올 심복들과 연락 가능하며 비상금을 소지한 채로 ‘가난 체험’에 나선다. 미망인의 집에 일꾼으로 들어갔는데, 그녀의 집적거림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면박을 주거나 항의할 수 없다. 그래서 설리반은 밤에 몰래 빠져나와 히치하이킹을 했는데, 그 차에 실려 할리우드로 돌아오게 된다. 설리반은 식당에서 한 엑스트라 배우를 만난다. 마침 그녀는 가망 없는 생활을 그만 접고 고향으로 돌아갈 작정이라, 거지 차림의 설리반에게 햄과 달걀을 사준다. 이때 그녀의 대사들이 참 재밌다. “누가 누굴 위로해요? 음식값 내주는 건 난데. 거만한 척 말아요. 남자한테 밥 사는 게 왜 좋게요? 남자의 농담에 억지로 웃을 필요가 없죠.” 하지만 이후 그녀의 자기 인식은 더 뻗쳐나가지 못한다. 은혜를 갚겠다며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설리반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녀가 느꼈을 수치심과 설리반의 기만적 태도는 로맨스로 봉합된다. 그러니 여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조금 특이한 ‘스크루볼 코미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리반의 여행>은 후반 30분에서 다른 길을 간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빈민들에게 지폐를 뿌리던 설리반은 한 노숙자와의 격투 후 실신하고, 그 와중에 신원보증서도 잃는다. 기차에 실려 갔다가, 어찌어찌 먼 지역의 법정에 서게 되고, 신원 불상의 범죄자로 6년의 노동형을 선고받는다. 설리반은 최소한의 의식주가 보장되지 않는 극악의 환경에서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러다 한번은 동료 노역자에게 “내가 감독처럼 안 생겼어요?”라고 묻는데, 동료 죄수는 적의 없이 “무슨 얼간이나 미장이 같아.”라고 한다. 거기서 설리반은 알게 된다. 돈과 같은 자본을 빼앗긴, 본연의 자신에겐 빈자들과 구별될 어떤 ‘다름’도 없음을. ‘변호사를 쓰게 해 달라’는 요구나, 교양있는 말투도 이곳에선 쓸모가 없다. 설리반은 자신의 처지를 구제할 수가 없다. 그때 비로소 그는 수치심을 넘어 암담해지지 않았을까? <설리반의 여행>은 한 보 더 나아가, ‘가난한 인물은 수치심보다는 생존 본능, 암담함에 더 깊이 고통받는다’고 보여주는 듯하다.
② 엘리트 감독인 화자: ‘자기비판’으로 위장된 타협
다행히도 설리반은 ‘내가 영화감독 설리반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기지를 펴서 신문에 얼굴이 실리고, 할리우드에 복귀한다. 그의 기적적인 ‘모험담’은 신문에도 대서특필된다. 설리반은 위선의 값을 치른 걸까? 되찾은 그의 일상에선 별다른 흠결이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어부지리로 사랑 없는 결혼을 끝냈고, 새 사랑도 찾았다. 물론 ‘거지 행세’가 사법적인 죄는 아니다. 하지만 ‘부자 행세’를 하던 가난한 사기꾼들이 파국의 결말을 맞았던 걸 떠올려보면(지명 수배의 위협에 시달리던 리플리, 부잣집 지하에 숨어 살게 된 기택) 설리반의 엔딩은 안전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설리반에게 남은 것은 ‘깨달음’이다. 설리반은 ‘되찾은’ 일상 속에서, 빈민들을 떠올린다. 동료 노역자들과 함께 흑인 목사가 이끄는 교회에서 디즈니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며 박장대소했던 기억을. ‘그들은 그저 그 순간을 즐기려 영화를 본다’는 깨달음 아래, 설리반은 사회비판물이 아닌 다시 코미디 영화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러니까 설리반은, 사람들을 웃겨주는 광대로 살자는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잘 쓰인 시나리오 안에서 부드럽게 도출된 이 결론의 정체가 의문스럽다. 다루기 어려운 소재니까 가난에의 탐구를 포기하자는 걸로도 들린다. 그렇다면, 선심성 적선이 아니라 자선 사업이라도 벌이면서 빈자들과 주기적으로 교류하면 될 일 아닌가. 한편으로 설리반은 자신의 고민을 어물쩍 뭉개고, 퇴보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가 만들었을 코미디 영화에 대해 생각해본다. 영화 속 설리반은, ‘당신의 모험담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작자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작품 밖 현실을 사는 프레스턴 스터전스 감독은 이 <설리반의 여행>을 만들었다. 이 자전적 블랙코미디를 통해서 스터전스 감독은 별다른 성찰 없이 ‘스크루볼 코미디’를 만들던 동료 감독들에게 일침을 놓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일반 대중보다는 설리반이나 스터전스 감독에 가까운 이들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들이 이 코믹한 계몽 서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플루토(디즈니의 강아지 캐릭터)의 슬랩스틱에 깔깔 웃던 빈민들이 <설리반의 여행> 속 풍자를 이해할 수 있었을지 궁금했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과장된 슬랩스틱 장면들이 길게 펼쳐지지만, 그건 감정 묘사의 미묘한 톤과는 동떨어져 있다.)
자신의 서사를 예술로 완성 시키고, 다수가 볼 수 있도록 배급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은 특권이다. 팔십여 년 전엔 더더욱. 설리반과 스터전스 감독 둘 다 주인공, 화자, 주체의 자리는 끝내 내어주지 않았다. <바튼 아카데미>의 맹점과 동일하다.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면서, 그 타자를 주인공 삼을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않는다. 결국, 타자에 대한 제 이해가 미진함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화자를 내세우는 비겁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 아닐까? ‘설리반에게 국자로 물을 퍼먹이던 동료가 그의 자리에 대신 돌아갔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왕자와 거지>처럼 말이다.
③ 풍자의 유효성: 풍자는 체제를 해체할까, 봉합할까?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대공황의 끝물이었고, ‘스크루볼 코미디’가 유행하고 있었다. 중산층은 몰락하고 노동계급은 부랑자로 떠돌던 그 시기에 ‘김은숙 드라마’의 조상님이 탄생하고 있었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 코미디의 세계에선 남성성이 도전받으며, 남녀가 육탄전과 말싸움을 벌인다. 말싸움의 과격함은 ‘은숙드’와 비슷했고, 표면적인 역할 바꿈에 집중하는 건 ‘은숙드’ 이후 쓰인 많은 ‘주체적 여성’, ‘젠더 스위치’ 서사 같았다. 또한, 상류층은 떼거지 조연으로 등장해서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며 무능과 허영을 뽐낸다. 남성 사기꾼은 상류층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부유층 자녀와 사랑에 빠지며 계급 간 화합을 이루어낸다. (반대 예시로는, <내 사랑 고프리>, <설리반의 여행>) 이처럼 ‘스크루벌 코미디’는 상류층의 권위는 소거된 풍자의 세계에서 ‘하극상’을 통해 영화를 보는 무산계급이 공격성을 해소하게 했고, 실재하는 고통을 지웠다. 아, 질 나쁜 일자리를 통해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긴 했단다.
통쾌한 풍자는 위로가 될 수도 있지만, 구조를 보지 못하게 하는 눈가리개도 된다. 아래는 SNL 한동훈 편에 대한 비평이다. SNL이 권력에 인격을 부여한다고 지적하며, 유마가 규범을 이완시키는 동시에 그를 더 견고하게 만든다는 테리 이글턴의 말을 인용한다.
이때 ‘한동안’은 한동훈 특유의 반복적이고 폐쇄적인 화법을 흉내 내지만, 콩트는 그 화법이 가진 소통 불능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의 말투를 사소한 버릇으로 치환해 한동훈에게 비판의 통제권을 일임한다. 유머가 정치인의 권위를 보전하게 된 것이다. 테리 이글턴은 '유머란 무엇인가'에서 유머는 규범을 이완시키면서 동시에 그 규범을 더 견고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방송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은 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스스로의 텍스트를 ‘인간적인 면모’로 가공하고, 방송은 그들이 이용할 수 있게 템플릿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는 관객과 시청자가 가진 정치적 관심을 분산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무관심까지 유도한다. 많은 정치인들이 이 무대에 거리낌 없이 오르는 이유도 결국 쇼의 이러한 특성이 그들의 이미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웬만한 코미디보다 웃긴 정치, 고통 들춰야 '진짜' 코미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1023100003895
‘하찮게 만들기’는 결국 ‘착즙’의 일종이다. X 유저들의 언어에서, 하찮음은 귀여움이며, 곧잘 연민과 사랑으로도 연결될만한 가치다. 트럼프가 ‘도람뿌’라 불리고, 일론 머스크의 트랜스젠더 딸이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중에 그들에겐 인격이 부여된다. 그들은 수많은 밈에서 우습고 하찮은 캐릭터로 활약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권력은 잘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2018년 미투 당시, 대학교 학내에서 학생들이 가해자 교수의 연구실을 포스트잇 테러하던 시민활동에도 주의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가해자를 하찮게 취급하며 비꼬는 몇몇 문구는 가해 행위의 심각성을 희석할 가능성이 있다. 하물며 기득권의 ‘자학 개그’에 편의적 관점이 교묘히 반영될 가능성이 얼마나 크겠나? 남 교수, 남 감독이 어린 여성을 추행하고 강간하던 홍상수 영화가 오랜 기간 ‘고발물’이 아니라 어떤 진보 지식인들의 ‘길티 플레저’, ‘대나무숲’으로 존재해왔음을 생각해보라. 어떤 치부를 털어놔도, 권위 있는 평론가들에 의해 예술로 승화되던 구조 안에서 그들은 얼마나 커다란 자유로움을 느꼈을까? 요즘 들어선, ‘상수 옹’, ‘상수 할배’같은 친근한 호칭을 쓰며, 그의 노쇠함마저 보듬어주는 리뷰들도 자주 마주한다.
한편, 봉준호 감독은 마치 비바리움 속에 생태계를 만들어놓고 지켜보는 조물주처럼 인물들을 관조한다. 봉준호 영화 속 모두는 멋없고 징글맞지만, 예를 들어 <기생충> 속 기택 가족과 부잣집 중 어떤 쪽이 더 오해 사기 쉬운가? 많은 관객들이 ‘부자의 위선’보다, ‘빈자의 그악스러움’을 훨씬 싫어하면서 ‘하층민끼리 싸우느라 단합이 안 된다’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영화 속 기득권에 갈수록 인격이 부여된 탓도 있어 보인다. <마더>(2009)의 제문, <설국열차>(2013)의 메이슨, <기생충>(2019)의 동익, <미키17>(2025)의 마셜로 갈수록 리얼한 소시민에서 귀엽고 우스운 지도자가 되어간다. 개입하지 않는 태도는 결국 강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블랙코미디는 ‘모두 까기’가 아니다. ‘공감성 수치’를 통해 인물에 공감하게 하고, 그가 처한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내야 한다. 그가 ‘하찮은’ 시련을 이겨내고 뚜벅 나아가도록 등을 떠밀어 주면 더욱 좋겠다.
진보성의 결함을 보완하지 않는다면, 옛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앞서, <설리반의 여행>이 가진 한계와 코미디 장르의 역할에 대해 돌아보았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진보 지식인의 그러한 타협과 자기방어가 극복되지 못한다면 맞게 될 ‘백래시’에 대해 써보려 한다. IMF의 한복판에서 등장한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를, 다들 알 것이다. 나는 그 쇼를 2020년에 ott에서 최초 시청하였는데, 그 독특함에 매료되어 난생처음 대가족 구조를 긍정적으로 느꼈다. 거기서 가부장제는 언제든 전복될 수 있는 우스운 시스템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정상 가족’ 신화의 일환이었다. 외환위기 시절 그들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건, 전문직 의사 가문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선 여성들이 맨 먼저 해고 대상이 되었고, 여성과 아동에 대한 가정폭력은 급증했다.
코로나 이후 여러 방송사 유튜브 채널에서 예전 시트콤이나 <아내의 유혹>같은 막장 드라마에다 예능 식으로 자막을 붙여 스트리밍했다. 그를 통해 유입된 나 같은 자들은 자막 같은 외부적 시선을 통해 죄책감 없이 구습의 악취를 소비했고 말이다. 그걸 ‘뉴트로’라고 불러도 될까? 세기말, 2000년대의 맛, 촌스럽고, 웃기고, 과격한 허물들… 거기로 돌아가길 원치 않지만, 기꺼이 즐기는 심리를…. 어디선가 <가문의 영광;리턴즈>같은 만듦새 떨어지는 복고 코미디가 등장하면 ‘쉰내 나는 옛것’이라고 ‘두드려 패’지만, 완성도 높은 ‘뉴트로’는 언제든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 또한, ‘자기 검열이 여성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깨달은 이후 조심스러워지고, 너그러워졌다. 상황은 2019년 ‘베스킨라빈스 광고’ 논란 때보다 훨씬 나빠져서 ‘언더피프틴’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오는 지경이지만, 식이 장애 수준의 저체중과 노출 의상도 스타일링의 다양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SNL에서 여자 배우들로 하여금 뱉게 하는 성적 농담도, 미국에서 넘어온 ‘쿨-bitch’ 캐릭터의 맥락에서 ‘주체성’으로 이해된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로 자기 서사를 쓰고 있는 젊고 감각적인 전업주부들은 독박육아의 단면조차 ‘자학 개그’로 승화한다. ‘동탄맘’, ‘대치맘’처럼 미디어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를 자신이 다시 패러디하기도 한다. 68혁명 이후 널리 퍼진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역풍을 맞은 후, 무능과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개인주의가 되었다. ‘다 알고 하는 거니까’, ‘알면서 소비하는 거니까’ 백래시가 ‘자학 개그’일 수 있을까? 아니, 백래시는 백래시다.
진보성의 결함을 보완하지 못하고 ‘자학 개그’로 퇴보한다면, 역사는 ‘더 나빠진 버전’으로 반복될 것이다. ‘자학 개그’ 후에는 반드시 한 발짝 앞으로 가야 한다. 스터전스 감독은 <설리반의 여행> 이후 자신이 몸담았던 영화계에 대한 비판을 사회 전반으로 확장했다. (나는 아직 스터전스 감독의 이후 필모그래피를 모두 확인하진 못했다.) 다음은 <정복자 영웅을 환대하라>(1944)의 로그라인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웅으로 전사한 아버지를 둔 우드로는 만성 비염 때문에 한 달 만에 해병대에서 제대한다.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인 척하며 숨어 지내던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해병대 전우 헤펠핑거를 만난다. 헤펠핑거는 그에게 전쟁 영웅으로 고향에 돌아갈 것을 권유하고, 우드로는 어쩔 수 없이 이 사기극에 동참하기로 한다.’ 우드로는 사기극을 통해 시장 후보까지 되었지만 결국 진실을 고백하고, 사람들은 그의 정직함에 감동한다. 동시대 우리의 코미디 또한, 곪아있는 시스템과 기득권과 그 사이의 나를 자조하는 데서 나아가, 구조를 흔들 힘을 키워내야 할 것이다. 풍자가 구조를 흔들지 못할 때, 우리는 다시 '그 시절'을 살게 될 테니까.
같이 읽으면 재밌을 글 소개합니다. 신문 칼럼에서 종종 '자학개그'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