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 리뷰
코미디로 무마한 많은 것들
김은숙 발 K-로코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들여다볼수록 근본이 없다. 서구의 로맨스 계보에서 비켜난 한국적 판타지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로맨스 속 계급 차는 빈자로 위장한 부유한 남자가, 마찬가지로 부유한 남자의 오만한 딸을 깨우치는 식으로 구현돼왔다. <개구리 왕자>, <지빠귀수염의 왕>이 그 예시다. 미국 스크루볼 코미디 시절(1930년대)에는 중산층(기자 직군이 많았다.) 남자가 정체를 숨긴 ‘상속녀’와 맺어졌다. 계급 갈등 봉합과 여성 계몽을 목적으로 한 ‘젠더 스위치’였다. 이후에는, 인물 구도가 ‘신데렐라 스토리’에 부합하는 작품들이 흥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에선 ‘유흥접객원’과 고객의 관계를 다뤘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5)의 로렐라이(마릴린 먼로)는 ‘쇼걸’이었으며, <티파니에서 아침을>(1962) 속 사교계 명사 홀리(오드리 헵번)는 어린 시절 매매혼을 경험했던 사교계 명사였고, <귀여운 여인>(1990)의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은 ‘콜걸’이었다. 일축하면, 로맨스 계보 속에서 경제·사회적 기반이 없는 ‘평범한’ 여성이 부유한 남성을 만나 ‘해피엔딩’을 맞는 레파토리는 찾기 어렵다. 그러니 <아노라>를 신선한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하는 건 지극히 한국적 시각이다. (<들장미 소녀 캔디>(1976)를 보면, 이는 동아시아 특유의 판타지로 보이기도 한다.)
다만 ‘신선한 신데렐라 스토리’라는 수식 중 신선하다는 건 맞는 말이다. ‘상향혼(이질혼) 실패→동질혼 암시’의 레퍼토리가 로맨스에서 흔하진 않으니까. 이는 70년 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훌륭한 클래식이 동병상련 로맨스로 관객을 이입시켰다면, <아노라>는 실패한 로맨스에 가깝다. 상대 남성의 ‘정서’가 그 차이를 만든다. 기혼 여성과 데이트를 하던 제비 폴은, 자신의 신세 탓에 홀리에게 애정표현은 하지 못하고 그녀의 짝들에게 계급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러나 <아노라>의 이고르는, 용역으로써 맡은 바 순조롭게 아노라를 제압하며 ‘자기효능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고르와 아노라는 같은 아픔을 겪고 있지 않다. 대신 그는 그녀가 결혼을 지키려는 과정을 지켜보는 ‘개구리 왕자’적 조연으로 머물렀다. 그 시선은 그녀의 수치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의 ‘카섹스’에서 아노라는 이고르가 훔쳐온 반지의 대가로써 관성적으로 섹스를 주도하다가, 울면서 마구 그를 때린다. 나는 이 장면의 구타가 결코 ‘감정공유’로 보이지 않았다. 이렇듯 <아노라>는 동병상련의 ‘로맨스’가 아니다. 그렇다고 재치 있는 ‘스트리퍼’의 사기극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건 ‘코미디’ 뿐이다. 그러니 <아노라>는 로맨스의 서사 구조를 가졌지만, 실은 속 빈 소동극이다. 성매매의 폭력성을 ‘코미디’를 통해 털어냈고, 성매매 여성을 자본주의 시대의 ‘셀러(seller)’로 그려냈다. 그리고 이 유능한 셀러가 겪는 시행착오를 통해 현대 여성들에게 이런 교훈을 주는 듯하다. “주체적 여성으로 ‘셀프브랜딩’ 하라.”
맞지 않는 아노라
극 중간에서부터 아노라는 ‘이동권’을 박탈당한다. 스크루볼 코미디의 대표작인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에서는 젊은 여성이 남성의 구속(약혼자 혹은 아버지) 없이 홀로 여행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동행을 자처해 그녀를 돌보던 중산 계급 남성은, 같은 방에 투숙하면서도 자신은 강간하지 않았다며 농담하듯 으스댄다. 그리고 90년 뒤 제작된 영화 <아노라>에서는 빈곤한 성매매 여성 앞에서 “나는 강간하지 않아.”라고 어필하는 남자를 볼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에게 부여하고 눈감아 온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는 점이, 현대 여성 관객들에게도 어필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고르가 만약 아노라의 감정을 헤아렸더라면, 빈집에서 동침하지도 않았을 테고, 다이아 반지도 아노라의 짐에 넣어둔 채 티 내지 않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아노라의 섹스에 응하지 않았을 것 같다. 코미디가 섞인다고 로맨틱한 감정선을 깔 자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냥 시나리오의 드라마적 실패로 보인다. 이에 더하여 아노라가 제 몸에 닿을까 두려워하는 용역 깡패들의 모습 또한 오로지 슬랩스틱 코미디만을 위한 허황된 현실로 보였다. 만약 아노라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으로 상황을 중계했더라면, 용역들의 태도를 ‘sns 시대’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아노라에겐 통제에 균열을 내는 재치가, 이고르에겐 계급적 박탈감을 느낄 감성이 없었다. 이처럼 감독은 캐릭터를 쌓는 대신 코미디만 강화했다.
성구매자와 여성 간 위계도 마찬가지로 지워졌다. 이반과 아노라는 ‘안전주의 양육’(조너선 화이트)을 받고 자란 ‘MZ’의 ‘금쪽이’같은 태도와 ‘스타일’적 공통점 탓에 동질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반은 ‘맥시멀리스트 졸부’, 아노라는 케이팝 아이돌처럼 스타일링 됐다. 그 외에도 평범한 20대 같은 아노라의 순간들이 연출된다. 퇴근길에 왕방울 헤드셋을 쓰고, 전자담배를 피우며, 플레이 리스트가 구리다고 무시당했음에 발끈하고, 이반이 부유해 보이자 ‘앱 개발을 하냐’고 묻는다. 감독 왈, 70년대풍으로 연출했다는 영화의 ‘쌈마이’ 감성에 잘 스며들어있다. (‘레트로’보다는 열화된 ‘대중 감성’에 가까운 무드(mood)를 통해 예술영화의 거부감을 줄이고 싶었던 건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한, 이 둘은 ‘페이크 다큐’ 장르 예능에서 개그맨들이 주로 하는 ‘성대모사식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기성세대가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이모지’같은 표정들이다. 이반의 ‘조루’에 피식피식 웃는 아노라, 자기 아빠를 모르자 ‘푸우우~’ 헛웃음 치며 ‘구글링’해보라는 이반, ‘1시간 권 끊었는데 45분이 남았다.’는 아노라의 말에 또 헛웃음 치는 이반. 감정이 한 방향으로 읽히지 않아서, 관객을 눈치 보게 만든다. 그렇다고 극 속 상대에게 던지는 무언의 ‘서브 텍스트’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냥 20대 초반, 그 세대의 태도로만 남을 뿐이다.
유능한 셀러, 아노라
정확한 목적 없는 블랙코미디는, 관객이 인물의 심리에 닿지 못하게 튕겨내는 표면을 만들어 버린다. 앞서 말한 ‘성대모사식 연기’ 때문에 관객들은 아노라의 감정선을 따라서 상실의 아픔을 느끼는 게 아니라, 사건에 대처하는 그녀의 태도를 관찰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처음부터 아노라는 유능한 ‘셀러’였다. 거부감 들지 않게 하는 솔직한 태도가 으뜸이었다. 늘 관계를 리드했다. 주로 그녀가 제안하되 꼭 동의를 받았고, 끝나면 늘 ‘좋았냐’고 물으며 “즐거웠길 바라.”라고 인사했다. 이반이 ‘누나 같다’라는 대사는 괜히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고객더러 ‘ATM으로 가자’고 하는 등 호객행위도 잘 하고, 어려운 분위기에서도 ‘새해엔 추가 요금이 있다’며 제때 돈 이야기를 꺼낼 줄도 안다. ‘1시간 권 끊었는데 45분이 남았다’고 일깨우며 ‘소비자’의 권리를 챙겨주고, 반지를 받았으니 힘든 상황에서도 대가성 섹스를 해줬다. 게다가 이반네 가사 도우미나 용역 깡패들을 나서서 상대하려는 ‘와이프’의 면모까지 겸비했다.
그런 아노라가 왜 이반의 변절을 내다보지 못했을까? 나는 이것이 ‘캐붕’(캐릭터 붕괴)이라고 봤다. 수없이 많은 남성 고객을 상대하고, 그들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을 알았으면서, 이반의 방식이 별다를 거 없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23살의 ‘스트리퍼’라면, 결혼의 꿈을 꾸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요금을 더 내게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또, 소위 이런 ‘공사’에는 업주가 공모하는데, 아노라 옆에는 놀랍게도 그런 사기를 주도하고 선불금을 만들어내는 업주가 없다. 동료 여성들도 아노라에게 그런 권유를 하지 않는다. 만일 아노라가 좀 더 비관적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약삭빠른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아노라를 어여삐 여겨서는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여성 일반에 적용될 만한 교훈을 주기 위에, 주인공 아노라는 그런 낭만을 지닌 여성이어야 했을 것이다. 남성이 어떤 수를 쓰든, 여성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오해를 하고 있는.
아노라가 ‘평범한 여성’이 되어선 안 된다
아노라가 놓친 ‘거래의 생리’를 복기해보자. 여성의 성은 남성의 재력과 반영구적으로 교환될 수 없다? 분수를 알아라? 감독은 왜 2020년대에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까? sns, 스타성, 매력 등등으로 ‘신흥 계급’을 이루고 끝내 상류층에 스며들길 꿈꾸는 여성들에게 삶의 진실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귀한 존재가 되어 왕자에게 구원받고 싶다.’라는 김은숙 드라마의 환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처럼. 사실 이 판타지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부의 이전이나 ‘공주 대접’이 성매매의 ‘열화판’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그게 ‘귀한 존재’에 대한 대접이 아니란 걸 말이다. ‘백마 탄 왕자 판타지’는 타인이 자신을 애타게 원하길 바라는 인정 욕구와 돌봄에 대한 갈망이 섞인 형태다. 같은 환상을 남성이 품는다면 그건 여자친구와 아내의 돌봄 노동으로 구현될 수 있지만, 여성이 그 판타지를 이룩하긴 여전히 어려운 게 현실이다. 현실의 ‘젠더 불평등’을 빼놓고, 판타지를 가진 여성을 어리석다고 탓하며 조급함을 조성하는 것이 <아노라>가 2020년대에 내놓은 얕은 통찰이다.
그리고 감독의 의도와 달리 관객의 태도는 양극단으로 나뉘었다. ‘성노동’ 담론을 힙하게 받아들인 쪽과, ‘성매매 미화’라며 분노하는 쪽으로. 첫 번째는 아노라가 겪은 시행착오와 그 안에서 보여준 태도를 멋지다고 느꼈을 것이다. ‘인지행동치료’를 통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을 긍정적인 쪽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교환 대상 삼으며, 그를 통해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도 믿는다. 플레이 리스트들에서도 느껴진다. ‘TheEnd | 아노라, 난 누구의 장난감도 아니야’, ‘Party Playlist, 젊은 시절엔 누구나 화려한 사랑을 꿈꾼다 #아노라 #anora’ 두 번째는 ‘성노동’ 담론에 반대하는데, 이를 ‘성매매 미화하지 말라’고 표현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주체적 여성으로 ‘리-브랜딩’하라.’는 팁을 얻든, 성매매에 대한 반감을 강화하는 쪽이든 둘 다 성매매 당사자 여성들에겐 영양가 없는 일이다. 유사 성매매의 ‘양지화’는 정말 ‘막장’에 있는 사람들의 처우를 지워버린다. <아노라>를 보고, 터치에 대한 엄격한 규제 아래 유사 성행위로 돈을 벌고, 업주와도 친근히 어울릴 수 있는 업소가 대부분일 거라고 믿는 이들이 없겠는가? ‘성노동자’ 담론을 통해 ‘스트리퍼’, ‘AV배우’, ‘그라비아 모델’, ‘아이돌’ 순으로 개방하여 ‘온 세상의 매춘화’을 이뤄도, 진짜 밀실 속 여성의 입지는 되려 좁아질 것이란 이야기다. 점진적으로 여성의 ‘성 상품화’를 목표로 하되, ‘성매매 업소’에 있는 여성들부터 구출하여 자립을 돕는 것이 우선이겠다.
2025년 6월 17일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