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7일 작성한 글입니다.
잘 쓰인 성장 스토리는 잘 쓰인 사회화 교본이다
작법서 <스토리 메이커>에서 저자는 설명한다. 이야기란, 주인공이 비일상의 공간으로 모험하고(혹은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을 겪고), 깨달음을 쥔 채 일상으로 귀환하는 구조라고. 작법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에 반발감을 느꼈다. 유치했다.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며 느꼈던 찜찜함이 이 구조에서 비롯된 듯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이 경시하던 다시의 미덕에 눈을 뜨고 사랑하게 되는 <오만과 편견>의 엔딩은 ‘오만을 버리고 순응하라’는 깨달음을 주는 걸까? <코렐라인: 비밀의 문>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코렐라인과 치히로의 담력이 늘었다는 것만 느껴졌다. “어쩌라는 거야?”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사람들은 종종 작법을 따르지 않는 작가주의 영화(?)를 접했을 때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반대로 잘 쓰인 성장 스토리에 그런 반응을 하게 됐다. (예시로 든 세 작품 모두 내 ‘인생 영화’들이다)
미지의 존재를 만나는 것뿐이라면 그냥 가기만 하더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옴으로써 비로소 원래 자신이 있던 장소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즉, 주인공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일상이나 현실을 실감하는 것이 바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의 주제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야기란 현실의 재발견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중략) 즉,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란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라는 형태로 경험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과 같다. (오쓰카 에이지, <스토리 메이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나는 작법의 가치를 실감했다. 구조에 들어맞게 이야기를 쓰면서 메시지가 더 명확해졌고, 타인의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와 작법적 타협을 읽어내는 프레임을 하나 습득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콘텐츠를 소비하는 내 취향도 더 잘 알게 되었다.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등장인물이 모험을 통해 얻는 깨달음은 아포리즘(명언)이 아니라, 암묵지에 가깝다고.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 말이다. 우정과 사랑, 가족애를 배우고, 지리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는 새로운 기준으로 사람을 보게 됐다. 코렐라인은 부모님에 대한 애정의 갈구에서 벗어나 회색빛 일상 속 자신만의 재미를 찾을 수 있게 됐다. 치히로는 좀 더 주도적이고, 부모님의 소중함을 아는 아이가 됐다. 그리고 그건 인물 내면의 사고실험이 아닌, 갈등을 돌파해나가는 행동(액션)을 통해 알게 모르게 체득된다. (유독, 희곡 작법에서 아포리즘과 비슷해 보이는 ‘가설’을 세우고 그에 맞춰 이야기를 쓰게 하는 방식 때문에 내가 헷갈렸던 듯하다.) 이러한 암묵지는 등장인물의 성장과 동시에 사회화를 이끈다. 공동체가 잘 작동하는 데에 일조하는 사회적 인간으로 키워낸다. 그러니 매끄럽게 느껴지는 성장 스토리는 사랑이 넘치는 정상 가족 사회를 위한 교본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암묵지보다 학술서, 에세이 그리고 소설에서 차분히 내어놓는 작가의 통찰, 아포리즘에 반응하는 인간이었다. 이런 통찰들은 통념에 균열을 내서 사고의 전환을 돕는다. 상대적으로 반사회적인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반사회적인 깨달음을 도출하는 영화들도 존재한다.
관습을 벗어나는 결말은 반사회적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공동체를 망가뜨려라, 관계를 파괴하라’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코렐라인과 치히로가 계속 비일상의 세계에서, 가족이 아닌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간다면? 엘리자베스가 다시에게 실망한 후 더욱 방어적이거나 비관적인 인간으로 거듭난다면? 시청자더러 ‘시절 인연’의 씁쓸함, ‘인생무상’을 느끼라는 듯 막판에 커플을 찢어놓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2020, tvN)를 생각해보자. 그런 전개를 접하면 시청자들은 이야기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작가에게 분노한다. 로맨스에서 엔딩은 ‘혐관’에서 끝내 ‘사랑의 결실’을 이룬 후 이어지는 일상 몽타주여야 하는데, 이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반대로 결별로 끝나야 서사가 완성되는 멜로들도 있다. <우리도 사랑일까>, <건축학 개론>, <헤어질 결심>과 같은 불륜(?) 멜로들이다. 관계를 깨트려놔야지만 관객들이 자책 없이 정서적 여운을 즐길 수 있다.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갔다가, 내면에 약간의 균열을 안고 혼자 일상으로 복귀하는 구조다. ‘갔다가 돌아오는’ 구조는 로맨스보다 이러한 멜로들에서 훨씬 두드러진다. 여기서, 이야기의 매끄러움은 구조보다는 이야기에서 도출된 깨달음이 관습적이냐 비관습적이냐에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로맨스보다 멜로를 훨씬 더 좋아한다. 로맨스의 ‘해피엔딩’은 봉합에 일조하지만(실제로 스크루볼 코미디는 계급 갈등 완화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멜로의 이별은 개인을 성장시킨다고 믿는다. 백예린의 노래 ‘돌아가자’에서는 (연애가 끝난 후) ‘이젠 낯설기만 한 일상 속으로’ 돌아가자고 자신을 추스른다. 에세이 <혼자서 본 영화>에서 저자 정희진은 관계의 상실 이후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언뜻 보기에 반대되는 말 같지만,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또한 나는, 자멸하는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도 좋아한다. <테스>, <좁은문>, 발레 <지젤>, <춘희> 속 여성은 물리적 이별 후에도 남성을 열렬히 사랑하다가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맞는다. 나는 이들이 시대적 한계 때문에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고, 상대에게로 향하던 에너지를 굴절시켜 자신을 붕괴시켰다고 본다. 시대가 채 품지 못한 로맨티스트들인 것이다. 아포리즘까진 아니어도 이런 결말은 생각의 여지를 만들어 준다. 한편, <지붕 뚫고 하이킥>의 교통사고 ‘사망 엔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도 있을 듯하다.
어찌하든 흘러가는 시간들
나는 또 누군가에게 반하고 또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내게서 다 사라져 버리면 어쩌나
이제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
돌아가자 익숙한 저 언덕 너머
혹시 내가 문득 그리워진대도
돌아가자 이젠 낯설기만 한 일상 속으로
(백예린, 돌아가자♪)
몇 년 전 나는, 오랫동안 몰두해온 어떤 관계의 상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물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 끊어질 것 같았고 매일 밤 흐르는 눈물로 귀에 물이 찼다. 그 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어.˝ 이 말이 나를 살렸다.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여성서사에서의 자멸과 순응적 성장
앞서 언급했던 고전 멜로들은 종종 여성 관객들에게 반감을 사거나 반페미니즘 취급당하기도 한다. ‘여성의 주체성’을 좁은 의미로 해석할 때, 그녀들이 가진 사랑의 열정이 그녀들을 ‘남자에 미친 여자’라는 수동적 처지를 자처하게 만드는 위험요소로 비치기 때문이다. 특히 그런 양가적 관객 반응이 두드러지는 영화는 <피아노>(1993)다. 주인공 에이다는 불륜을 들켜 남편에게 감금당하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손가락을 잘린다. (불륜의 원인이 폭력은 아니다.) 바다 건너 뉴질랜드에 이고 지고 온 피아노를 못 치게 된 그 상황에서, 에이다는 계속 베인스에게 가려고 발악한다. 결국 남편이 에이다를 포기하고, 에이다는 새로운 결혼에 성공한다. 그리고 의수를 끼고 연주를 이어간다. 그녀의 마조히즘적 에너지를 과소평가하면, 에이다는 그저 ‘남자에 미친 멍청한 여자’다. 그러나 나는 에이다가 자멸도 순응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밀어붙였다고 봤으며, 이러한 <피아노>의 결말이 신선했다.
자멸한 여자 주인공 중에서도 흥미로운 사례들이 있다. <테스>의 테스는 자신이 동거 중이던 알렉을 죽이고 엔젤과 함께 도망쳤다가 잡혀 교수형을 당해 죽는다. 알렉은 예전에 테스를 강간했었고, 엔젤은 결혼 첫날 밤 테스가 강간당했었다는 사실을 듣고 그대로 도주했던 첫 번째 남편이었다. 그런 사람을 따라가고 싶다는 이유로 알렉을 직접 죽였다. 사실,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던 19세기 가난한 농민 테스에게 알렉과의 동거는 생존 요건이었다. 그게 납치혼(‘보쌈’: 약탈혼)에 가까울지라도, 알렉은 집요하게 테스를 따라 다니며 물질을 제공했다. 그런데도 생존이 아닌 사랑을 택하고 자멸한 테스라는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앞선 두 작품의 작가들은 불륜 멜로, 남자주인공과 ‘서브남’ 구도, 구원 서사 중 어떤 틀을 택하지 않았다. 에이다가 남편의 폭력 때문에 불륜을 시작했다면, 엔젤이 테스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고 사랑을 통해 테스의 상처를 그러안았다면 관객이 납득할 만한, 정서적으로도 만족스러울 이야기가 되었을 테다. 하지만 지금의 불가해하고 약간은 찜찜한 결말은 훨씬 오래 곱씹게 된다. 분명히 반사회적인 결말들이다. 그리고 붕괴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당대의 남성 독자들이 사디즘적으로 소비했을지, 여성 독자들이 자신들의 답답함을 투사하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가 궁금해진다. 이와 달리 <좁은문>의 알리사와 <춘희>(오페라 <라 트리비아타>의 원작)의 마르그리트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제롬과 아르망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 상대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자멸은 선택이 아니라 희생으로 느껴진다.
2020년대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았을 멜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2022,mbc)은 어떤 면에선 여자 주인공 덕임의 순응적 성장을 그려내고 있다. 드라마는 후궁이 된 이후 덕임의 꿈이 좌절되거나 돌봄 혹은 희생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덕임이 왜 그리도 산(정조대왕)을 밀어냈는지, 그녀의 감정을 이해해보려 할 때 시대적 요소보다 오히려 보통의 사랑에서 발생하는 애착의 문제를 떠올렸다. 덕임은 ‘혼란형 애착 유형’처럼 불가해한 감정선을 갖고 있는데, 산에게 몇 번이나 다가갔다가 도망쳤다가 다시 다가감을 반복하다가 끝내 그에게 잡혀준다(?) 승은 장면의 연출이 비관습적인데, 드라마 16회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두 번째 ‘키스신’임에도 불구하고 시청자의 설렘을 조성하긴커녕 슬픈 발라드가 흐르고 덕임은 죽상을 하고 있다. 그 후에 시청자들이 보고 싶었을 신혼부부의 달달한 장면들을 몇 개 던져준 뒤 한 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덕임을 병사시킨다. 뒤에 덕임의 유품이나 친구였던 상궁의 말을 통해 덕임이 처음부터 왕을 사랑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또 마지막 화는 수명이 다한 산과 저세상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덕임이 재회하여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 작품의 메시지를 ‘기질을 거스르는 사랑은 개인을 파괴한다’보다는, ‘기질을 거스르는 사랑을 하다 망가졌지만, 그래도 그 사랑을 선택해서 행복했다.’로 읽는다. 결말 때문이다. 만일 정석적인 성장 서사였다면, ‘기질을 거슬러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도출되도록, 작가는 17부작 중 1회에 불과한 후궁 시절의 비중이 확대되고 산을 사랑한 덕임의 선택을 부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산의 의지와 행동이 훨씬 크다. 시대적 배경 안에서 이런 선택이 ‘순응’으로 취급당할지라도, 그 선택의 주체성을 강조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았다. 지금으로써는 성장은 자존심을 굽히고 덕임을 잡은 산이 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래서 이 작품은 페미니즘 시류 안에서 탄생한 여성 서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남성의 성장 서사이다.
계속해서 순응적 성장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오만과 편견>, <엠마>(사람들을 짝지어 주는 걸 즐기던 귀족 여성 엠마가 그런 자신을 오만하다고 지적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제인 오스틴), <제멋대로 떨고 있어>,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속 주인공들은 자신이 치를 떨며 싫어하던 남성의 진가를 알고 사랑하게 된다. 주인공이 성격의 뾰족한 면을 깎아내고, 보다 넓은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성장이자 순응이지 않을까. (‘tmi’이지만, 10대에서 20대를 거쳐온 나의 이상형 변천사도 이와 흐름을 같이했다. 순응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쓴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여자 주인공이 자멸하지 않고 타인을 멸하며 끝나는 특이한 이야기들도 짚어본다. <도그빌>의 그레이스는 마을 사람들에게 강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이들을 이해하려 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고, 마을을 몰살시킨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는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라는 햄릿의 교훈을 거스른다. 모두가 공범이 되어 함께 케이크를 먹는 결말이다.
지금껏 성장 이야기의 구조를 따르거나, 거스르는 여성 서사들을 살펴보았다. 구조를 어길 때, 여성 캐릭터들은 성숙한 어른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가는 그런 캐릭터들에게 마음이 간다. 그러한 자멸 이후 다른 종류의 성장을 꾀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그녀들에게 주어지면 좋겠다. 다음 글에서는 성장 서사의 문법을 지키려 노력한 여성 감독들의 단편에서, 신선한 소재와 전달된 메시지 사이의 아이러니를 분석해보려 한다.
https://brunch.co.kr/@f483820ff9154c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