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성장'을 대체하는 자기 인식

<2인 1실>, <성미의 성미> 그리고 은희경 소설

by 정신차려 moziri

2025년 1월 24일 게시한 글입니다.



아웃사이더는 방어적인 사람이다

“영혼이 나가 있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데, 졸려?”,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주인 의식을 갖고 능동적으로 해야지.” 이런 말을 자주 듣는 사람들을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낮은 동작성 지능, ‘젠지’의 세대성, 사회성 결핍 등등 부정적 특성들도 쉽게 연상할 수 있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보다도 이들을 ‘방어적인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타인에게 품을 내어주려 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결국엔 슬그머니 내빼려 한다. 서두에 예시로 든 말들은 이들에게 위험 표지다. 타인이 자신을 통제하려 시도 중이며, 이를 통해 위계를 형성하여 자존감이든 영향력이든 과시하려 한다는 신호다. 이때, 일대일 관계가 아닌 집단 안에서 ‘아웃사이더’들의 생존전략은 자신의 에너지를 낮추고 둔감해지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그럼으로써 집단의 수명을 늘리는 데에는 거의, 전혀 관심이 없다. 공격당하지 않고 적당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게 그들의 생존이다.


최근 2년 내 제작된 단편 영화 세 편이 있다. 이들 영화의 주인공들은 ‘아웃사이더’라는 점에서 겹친다. 먼저, <성미의 성미>(2025, 장채린)의 주인공 성미는 ‘지각 대장’이다. 같은 건물 안에 있다가도 회의에 늦는다. 문제는 성미가 학원 강사라는 점이다. 선생이 아니라 ‘학생’ 같은 성미는 생활 전반에서도 소극적이다. 5평쯤 되는 좁은 교실에서 엎드려 자는 학생을 못 본 채 수업하며, 부원장이 ‘적극적으로 하라’고 눈치라도 줘야 겨우 의욕을 낸다. 학원 홍보 자리에서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한다. 또한, 학원장의 운영 방식에 불만이 많으면서도 항의하려는 마음만 품을 뿐, ‘뒷담화’로 배출한다. <2인 1실>(2024, 송예찬) 속 스무 살 정연은 ‘이래도 응, 저래도 응’하는 친구다. 한 지역 대학교에 입학한 정연은 동기 무리 안에서 즐거워 보이지만 사실 이곳에 재학하는 것 자체에 자괴감을 느끼는 중이다. 친구들과의 여름 여행에서 정연은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친구들이 ‘썸남’ 무리에 합류하자는 제안을 거절했는데도 끝내 버스터미널에서 ‘썸남’을 만나러 간다. 또 다른 영화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2024, 임지선)에서, 매가리 없는 중학생 한슬은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말을 못 알아듣고 되묻곤 하며, 덜렁거리는 지각쟁이에 준비물도 놓고 다닌다. 그리고 나는 이들의 행동거지가 그들의 무례함이나 방만한 생활습관 탓이 아니라 긴장도를 낮추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성장을 대체하는 자기 인식

그러고 이 영화들의 중후반부에서 주인공의 방어가 깨지는 순간이 온다. 『인간실격』의 요조가 친구가 자신을 꿰뚫어 봤다고 느꼈던 것처럼, 이들도 타인에게 자신을 들키고, 면박당하고, 거부당한다. 학원 동료 강사에게 학원 흉을 실컷 본 뒤, 성미는 그녀에게 “선생님은, 지각이나 좀 하지 마세요.”라는 훈계를 듣는다. 정연은, 막상 찾아가니 자신을 홀대하는 ‘썸남’을 맞닥뜨리고, (영화에서 암시적으로 표현되지만) 그와의 성관계 이후 연인이 되지 못한다. 나처럼 인물과 연령대가 비슷해서 자연스레 상황에 이입하는 관람자가 아니더라도, 이 사건을 기점으로 주인공이 급격히 암울해지거나 맥이 빠지기 때문에 보는 이는 그가 ‘수치심’을 느꼈음을 짐작한다. 즉, 이 영화들은 ‘수치스러운’ 사건을 성장을 촉진하는 장치로써 배치하고 있다. 하지만 ‘수치심’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복수를 결심하는 피해자의 감정과는 다르다. ‘수치심’의 작동 범위는 내면에 한정된다. ‘나의 생존전략이 무용했으며, 심지어 남에게 간파되고 있었다.’는 자기 인식이 활발할 때 ‘수치심’은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불킥’을 유발할 수는 있어도, 서사적으로 ‘행동’(액션)을 끌어낼 만큼 강력하지 않다. (멜로영화 속에서 이렇다 할 말 없이 도망치는 인물의 동기일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자기 인식을 미루는 ‘둔한’ 인물은 저 정도의 ‘일침’이나 소외를 무던히 넘기기도 한다. 이렇듯, 이 영화들은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하려 하고, 그에 대한 반발에 좌절될 뻔하다가 결국 해내거나 실패하는, 그 뒤에 모종의 ‘암묵지’를 터득하는 성장 서사의 공식과는 다른 구조다. 나는 이 지점에 주목하고 싶다. <성미의 성미>와 <2인 1실>은 수치심을 통한 자기 인식을 성장과 등치하고 있다.



주인공을 박대하는 창작자

비교적 성장 서사를 따르고 있는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잘 보인다. 한슬은 리코더를 가지러 집에 가는 중에 대낮의 천변에서 교복을 입은 채 노상 방뇨를 한다. 그 후에 갈아입은 엄마의 교복 치마는 포대 자루 마냥 정강이까지 오며, 리코더를 챙겼는데도 지각을 이유로 교실 앞에서 가창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사건이 연달아 터짐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한슬의 ‘수치심’이 노출되기보단 ‘행동’이 더 두드러진다. ‘코미디’ 색채도 있고, 한슬이 겪는 사건이 ‘타인과의 격투’가 아니라 사소한 땡땡이 사건일지라도 주인공으로서 미션을 수행하도록 작법이 등을 떠밀어 주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성미의 성미>와 <2인 1실>은 (감독과 같은 제작 주체가) 자기 영화의 주인공에게 상당히 박하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초기 은희경 단편 소설의 ‘엔딩 레퍼토리’를 떠올렸다. 여자 주인공들이 심적으로 비참함의 끝을 보고, 하지만 그게 심상한 일이라는 듯 소설이 끝난다. 그녀의 처지가 절대적으로 극악한 건 아니지 않냐는 듯. 예를 들어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 숲에 덫을 놓았을까」(2002)는 어릴 적 따돌림과 성희롱을 겪고, 사는 내내 타인에게 한 톨 만큼의 신뢰도 품지 못해온 소연의 일대기다. 그리고 이 우울한 이야기는 40대 소연이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으면서 속으로는 좋아했다던 남성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무겁고 답답하며 설명할 수 없는 역겨움 한가운데 온몸이 무기력하게 내던져진 기분으로 소연이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김영재의 희미한 얼굴 윤곽을 본 소연은 먼저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진지하게 해석해보았는데 그것을 김영재의 일방적인 폭력으로 여기기에는 자신이 여러 가지 여지를 많이 주었다는 판단이 들었으므로 마침내는 그가 너무 자책하거나 미안해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몸을 조금 움직여주었다. (중략) 인생은 반복되나 봐. 한 번 치인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어른이 되어서도 늘 비슷한 일들이 닥쳐오거든. 그때마다 어린 시절 학습된 대로 반응하게 되고, 결과는 똑같아. 소연은 가슴까지 끌어 당겨 붙들고 있던 이불을 놓아버린 뒤 알몸을 드러낸 채 그대로 일어나서 옷을 하나씩 입기 시작했는데 서두르는 건 아니었다. (중략) 하긴, 괜찮아. 불행한 사람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 고통도 아닐 테니까. 그저 따돌림당한 것뿐이잖아.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 숲에 덫을 놓았을까」, 2002, 은희경)


인물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른다.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로, 관계 속 소외감과 상처가 가혹한 ‘자기 인식’으로 마무리된다. 인물들은 자신이 미숙하고 순진했음을 탓하기도 한다. 여러 작품에서의 반복 때문에 이것은 작가의 태도로 읽힌다. 그리고 이 태도를 집필 시기나 1959년생 작가와의 ‘시차’라고 치부할 수만도 없다. 2015년,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당시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원래가 어떤 성적 폭력이나 ‘대상화’에 민감한 여학생이었고, 치를 떠는 나의 반응 또한 정당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연이 겪은 ‘준강간’에 대해 ‘이게 대체 뭔지’ 꽤 고민했던 이유는, ‘자기 인생을 직시해야만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다. 그것이 세련되고 강한 태도다’라는 은희경의 시각에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이 소설이 내 ‘인생각본’이 아닐까 하는 불안에 사로잡혔었다. 만일 작고한 작가였더라면, 내가 그의 환생이라고 상상했을 지경으로 인물을 넘어 작가와 날 과하게 동일시했다. 시나리오를 쓰고부터는 대본에서 ‘은희경식 세계관’이 작동하거나, 그에 대한 반발로써 ‘감정’, ‘주체적’ 에너지가 돌연 튀어나오길 반복했다. 그 결과로, 나에게서 온 인물은 멍청하고 ‘비호감’으로, 타인으로부터 시작된 인물은 ‘호감형’으로 그려졌다. 그래서 나는 도무지 사랑스러운 구석이 없는 주인공을 보면, 그게 나 같은 창작자로부터 온 인물이 아닐까 의심한다.



‘자기 학대’라는 ‘방어기제’

작년에, ‘여성 영화’로 분류된 단편 백여 편을 볼 일이 있었다. 내 짐작과 달리 ‘여성폭력’, ‘퀴어’ 소재 영화는 손에 꼽았다. 대다수 영화가 장르는 드라마 혹은 성장을, 인물로는 20~30대 여성을 선택했고, 인물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뉘앙스를 흘리며 끝냈다. 물론 20대 여성 관람자로서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 ‘느낌상’ 알았지만, 그게 이야기에서 도출되었다고 보긴 어려웠다. 드라마 구조가 부재하여 관람자가 인물의 감정을 따라갈 수 없는 상황에서, 배우의 연기와 화면은 있는 힘을 다해 온정적으로 굴고 있었다.


자기연민←자기 인식→자기학대(혹은 자학개그)


많은 감독들이 클리셰를 피하고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을 소재로 선택했지만, 차마 자기 서사를 ‘도파민 썰’로 ‘프레이밍’하여 재미를 추구할 마음 상태가 되지 못했던 듯 보였다. ‘자기 연민’이다. 반대편에 ‘자기학대’의 태도를 가진 감독들이 있다. 이쪽도 자기 인식이 온전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리고 사실, 서사 창작자―특히 대중 서사―의 초기는 원래 이 양극을 오가며 균형을 찾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야기 안에 나와 작동 원리가 판이한 타인을 등장시킬 수 있도록, ‘자기 인식’을 수양한다. 이때 타인은 나와 동일시되지도 않을뿐더러, 비슷하고도 달라 질투나 끌림을 유발하는 ‘거울’도 아니다. 내가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죽는 타인이다. 물론 작품 속 세계가 오직 ‘작가 내면의 투영’인 서사들에도 그만의 에너지가 있다.) 나는 은희경 초기 소설의 태도도 ’자기 학대‘에 가깝다고 보며, 이러한 ‘자기 학대’의 태도가 작가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추측한다. 이때 ‘자기 학대’는 ‘자멸’의 충동을 뜻하는 게 아니라, 외부 시선의 침투에 앞서 가혹한 잣대로 스스로를 벌하는 태도다. ‘자기 연민’하는 서사가 ‘감수성 과잉’으로 ‘소녀 감성’을 보존한다면, ‘자기 학대’하는 서사는 ‘소녀’라는 정체성 자체를 평가 절하하고 곡해하는 외부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감성을 보호하기 위해 두른 여성 작가, 감독의 갑옷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자기 학대’하는 서사의 경향성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이것이 어떻게든 성장 서사의 틀에 이야기를 넣으려다 생긴 타협인지, Z세대 여성 창작자가 공유하는 어떤 불안의 발현인지, 2020년대 페미니즘·퀴어·피해자 서사의 흐름에서 비켜나 ‘일상’의 이야기를 하려는 선택인지 의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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