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성장'을 대체하는 자기 인식②

<2인 1실>, <성미의 성미> 그리고 은희경 소설

by 정신차려 moziri

2026년 2월 8일 게시한 글입니다.


①에서 이어지는 글이지만, 개별 글로만 읽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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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하고 포용적인 성장 서사 속 세계

성장 서사란, 아이가 사회에서 별 탈 없이 기능하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영상 대본은 보통 1인칭 시점으로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주인공의 ‘행동’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관람자는 사회화의 기능에 대해 고민할 새 없이 개인의 이야기로써 몰입하게 된다. 기승전결의 결에서 주인공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지혜’, ‘성숙’의 의미를 띠고, 그가 지나온 난관도 필요악으로 보인다. 하지만 분명 성장 서사의 타겟 관람층이었을 어린이 시절의 나는, 주인공에 동화될 수가 없었다. ‘강가에서 기다리면 적의 시체가 떠내려온다’는 격언들이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한 시절 살아본 사람에게 와 닿듯, 그가 성장을 거치며 얻은 깨달음은 내겐 때 이른 가르침이었다.


그건 세상에 통달한 작가(혹은 감독)가 동시에 지닌 엄격함과 포용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물주 미야자키 하야오는 엄격하다. (앞선 글에서 다뤘던 은희경 작가는 매정하지만, 포용적이진 않다. 그는 조물주라기보단 소설 속 인물과 흡착한 존재 같다.) 아동 성착취범처럼 성애적인 기운을 흘리는 가오나시의 집착이나 똥물에 잠수해야 하는 퀘스트를 치히로에게 선사하는 점에서가 아니다. 그는 인간 외 존재들이 이름을 뺏긴 채 노동을 착취당하는 유바바의 온천을, ‘사람 사는 곳’이 어디든 그렇듯 ‘미풍양속’이 있는 사회로 묘사했다. 전능한 고용주 유바바조차도 ‘언명 행위의 효력’을 두려워하면서 뱉은 말과 계약을 지키려 하고, 직원들은 ‘보은’의 원리를 믿는다. 가마 할아범은 “남의 일 뺏지 마. (뺏긴 자의) 마법이 풀려.”, “(그래도) 한번 손댔으면 끝까지 해.”라며 치히로에게 예절을 가르치고, 유바바는 직원들을 꿀떡꿀떡 삼키는 요괴가 있는 방에 치히로를 들여보낼 때, “네가 문을 열어줬으니, 끝까지 책임져.”라고 명분을 세운다. 법 테두리 안팎에서의 착취와, 사기 피해를 유발하지만 동시에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개인 간 계약의 자유’가 공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극화된 버전 같다. 이 세계에서 치히로는 계약에 의지하며, 제 행동에 책임을 지는 ‘근면성실한 노동자’로 성장한다. 나아가 ‘도장을 도로 갖다 줄 테니, 하쿠를 살려달라’며 제니바에게 협상을 시도하는 점은, 노련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건, 치히로의 행동 동기다. 본래 부모를 되찾아 그 세계에서 나가기 위한 생존을 목적했으나, 나중엔 하쿠를 살리기 위해 움직인다. 가마 할아범은 이를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둘 간의 끌림은 보편적인 어른의 사랑과 달리 비성애적이고, 함께할 미래의 부재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 하쿠는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치히로에게 세 번이나 ‘줬고’, 놀랍게도 치히로는 ‘받은 것’을 소화하여 결국 하쿠를 살려낸다. 그를 조종하는 벌레를 밟아 죽이고, 유바바에게 뺏긴 이름을 기억해낸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는 이 세계의 법칙을 거스르며, 균열을 남겼다. 잘 쓰인 성장 서사는 이처럼 가슴 속에 예외를 품은 어른으로 아이를 성장시킨다.

그냥 이 밈은 올리고 싶어서 올렸습니다.ㅎ



인물을 소외시키는 ‘정체화’ 서사 속 세계

주인공이 성장을 회피한 채 살아가는(생존하는) 작품들을, 나는 ‘정체화(identification)’ 서사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해봤는데, ‘탈사회화’라고 하기엔 주인공이 사회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엔딩’에서 다시 녹아드는 그림이다. ‘재정체화’라기엔, 처음부터 사회에 이물감을 느끼던 인물이라 제대로 ‘사회화’된 적도 없다. 작가(혹은 감독)는 작품 속 사회를 성장을 추구할 수 없는 곳으로 묘사한다.


<벌새>(2018, 김보라) 속 사회는 남자 어른들이 여자아이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남매간 폭행이 암묵적으로 승인되는 94년도의 한국이다. 은희는 대치동 주민으로, 경제 계층 상 가구 소득이 중위 소득을 훌쩍 상회 했을 테지만 의사 아버지를 둔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그리고 “쟤는 공부도 못하고 대학도 못 가서 (나중에) 우리 집 파출부 할 거야.”라는 소리를 지껄이는 같은 반 아이에게 치인다. 그런 은희 앞에 영지 선생님이 등장한다. 그는 ‘페미니즘’과 ‘노동 운동’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고, 본인도 방황 중인 채로 은희를 자극한다.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이 말을 듣고 은희가 오빠에게 크게 반발하다가 부모가 보는 앞에서 따귀를 맞는다. 영지 선생님이 은희의 ‘페미니스트 정체화’를 유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원래도 오빠가 자길 때렸다고 저녁 밥상에서 부모에게 보고할 줄 알고, 친구와 함께 학원 선생을 험담하던 솔직한 은희에게 조금 더 힘을 실어주는 것에 그쳤다고 봐야 할까? 은희가 자길 좋아해 줬던 x 동생과 남자친구 앞에서 배시시 웃었듯이 호의적이고, 노래를 불러주고, 병문안도 오는 언니 같은 의미를 영지 선생님에게 두었던 건 아닐까? 이후 자기 내부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함인지, 영지 선생님은 개인 사유로 학원을 그만두며 이야기 안에서 사라지고, 참사에 희생되었다는 설정이 부여된다. 택배 주소를 보고 찾아간 은희는 영지 선생님의 죽음을 알게 되고, 어찌어찌 흐르던 이야기는 학교 운동장 동급생들 사이에 멍하니 서 있는 은희를 비추며 끝난다.


이처럼 인물의 변화 정도, 성장 서사를 흉내 낸 장치들(관습적인 엔딩, 수술) 탓에 <벌새>는 ‘정체화’ 서사와 성장 서사 사이를 맴도는 영화로 느껴진다. 만약 성장 서사로 치우쳤다면 부모가 은희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거나, 참사 희생자가 오빠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은희는 모종의 부채감 때문이라도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게 성장 서사의 문법이니까. 만약 강경한 ‘정체화’ 서사로 기획되었다면, 은희는 이미 자아가 많이 형성된 아이였을 테고, 믿었던 가치에 배신을 당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의 영화는 둘 중 어떤 노선을 택하지 않았기에 은희는 성장 서사의 주인공처럼 사회에 적응할 방식을 몸 부딪혀 배우지도, 사회에 반발하는 존재로 확실히 ‘정체화’하지도 못 했다. 그래서 <벌새>는 2018년 한국이라는 제작 조건 하에서 감독이 사회를 어떻게 묘사했느냔 측면에선 혁명적이지만, 서사를 펼치는 방식에선 모호했다.


성장 서사와 ‘정체화’ 서사 안의 스펙트럼


① 성장 서사는 ‘사회화’를 통해 아이를 사회에 편입시킨다.
<오만과 편견>, <작은 아씨들>, <성미의 성미>, <2인 1실>

② 좋은 성장 서사는 아이를 사회에 편입시키되, 가슴에 예외를 학습시킨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③ ‘얌전한’ ‘정체화’ 서사는 사회에 이물감을 느끼는 아이의 방황을 그린다. 그렇다고 아이가 ‘탈사회화’하지는 않는다. 아이는 가벼운 우울을 느낄 수 있다.
<벌새>, 은희경 초기 소설들

④ ‘과격한’ ‘정체화’ 서사는 아이가 자살(사회적 타살)하거나 ‘정신병자’가 되거나, 사회에서 이탈하거나 엇나간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여고 괴담2: 메멘토 모리>, <성적표의 김민영>,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


내 개인적 기준에 근거해 성장 서사와 ‘정체화’ 서사를 4개 유형으로 나눠보았다. 이 글을 막 쓰기 시작했을 한 달 전, 나는 작가의 ‘자학적’ 태도와 주인공이 느끼는 수치심, 이 두 가지 공통점으로 은희경 초기 단편과 두 단편 영화를 묶고자 했다. 그런데 들여다볼수록, 작가가 자신의 의식을 안전하게 봉합하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벌새>의 김보라 감독과 은희경 작가는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보고, 매정한 태도로 인물을 묘사하면서, 작품 밖 이들의 시선으로 작품이 완결되도록 유도한다. ‘이걸 좀 보세요’하는 태도랄까. 이와 달리 <성미의 성미>, <2인 1실>은 타협점, 봉합으로서의 ‘성장’이 아니라 감독이 진심으로 영화를 성장 서사의 틀에 넣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 작품 내적 설득력을 갖췄다고 보였다. 그래서 나는 <벌새>와 은희경 초기 단편들은 ③, ‘얌전한 정체화 서사’로, <2인 1실>, <성미의 성미>는 ①, ‘성장 서사’로 각각 분류했다. 각 특성에 대해 차례로 설명하겠다.


김보라 감독과 은희경 작가의 시각은 ‘이중 의식’ 개념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듀보이스’는 ‘이중 의식’을 가진 주체에 대해, ‘오직 끈질긴 강인함만이 그 몸을 갈라놓지 않고 지켜냅니다.’라고 설명한다. 여성 혹은 흑인이라는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주체는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동시에 ‘제국의 1등 시민’, ‘범죄자’인 것처럼 자신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며 자기 검열하는 인물을 쓰거나, 인물을 박대하며 매정한 세계를 그려낸다. 그렇게 주인공이자 화자의 자릴 지켜냈지만, 여전히 작가는 불안하다. 그래서 누구보다 판단력이 뛰어나고 촌철살인의 유머를 보여주던 화자의 목소리로 주인공이 사회에 순응하는 결말을 말한다. 그런 ‘자학’적 태도가 자기 인식을 끝까지 밀어붙이던 일종의 ‘공격성’을 상쇄해주기 때문이다. 주인공, 화자의 자릴 전유하면서도 동시에 성장 서사라는 관습적인 서사 장치 안에 일정 부분 머무르는 이유다. 그것은 작가가 그에 동의했다는 의미보다는, 어쩌면 패러디와 같은 ‘수동 공격’이다. 그래서 이를 표면적으로 파악하는 관람자들로부터 ‘여성혐오’적 이야기라는 인상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실제로 ‘자학적’ 공격성의 일부는 ‘메일 게이즈’의 재현이다. 여성 소비자들의 의견이 부각되는 2020년대 이후로는, 작품을 단순화하거나 아예 무관심한 남성들의 배제와 함께 여성들의 집요한 도덕적 단죄와 작가에 대한 병리적 해석을 맞닥뜨려야 한다. (90년대 문학 평론을 추가로 살펴봐야 한다.) 이러한 ‘리스크’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룰 예정이다.


이중의식, 즉 항상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조롱 섞인 경멸과 연민이 담긴 시선으로 자신의 영혼을 재는 듯한 이 기묘한 감각은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중략) 오직 끈질긴 강인함만이 그 몸을 갈라놓지 않고 지켜냅니다. 미국 흑인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투쟁, 즉 자의식 있는 남성성을 획득하고 이중적인 자아를 더 나은, 더 진실한 자아로 통합하려는 열망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통합 과정에서 그들은 어느 한쪽의 자아도 잃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중략) 미국은 세계와 아프리카에 가르쳐 줄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백인 미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자신의 흑인 혈통을 지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흑인의 피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흑인 민족의 영혼』, 듀보이스)


가부장제의 문장(판결)으로 병들고 감염되었지만, 자신 안에서 느껴지는 ‘시적 정열’의 절박성을 부인할 수 없는 여성 작가는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개발했을까? 그녀는 어떻게 남성 텍스트의 거울을 벗어나 그녀 자신의 권위를 창조할 수 있는 전통 속으로 춤추며 들어갔을까? (중략)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유사 남자, 남자 모방자가 되어 자기 정체성을 가장하고 스스로를 부정하여 불확실하고 잘못된 신념의 문학을 허다하게 생산해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수잔 구바, 산드라 길버트)


그리고 <성미와 성미>, <2인 1실>는, 작가가 이중 의식을 갖는다기보단, 사회의 부조리를 감지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영화 속 몇몇 뾰족한 지점으로 남겨두고 성장 서사를 따라가려 한다. 이 과정에서 구조와 개인의 문제를 섞어서 보여주고, 주인공이 수치심을 느낀 후 ‘성장’하여 구조에 적응하게 한다. ‘성장’의 포석이 되는 ‘갈등’ 또한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단 ‘수치심’을 유발하는 개인적 사건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무명 배우, 영화감독, 예술가가 그만두는 이야기들에서 쉬이 (지속성, 전근대·현대·포스트모더니즘 예술 간 기준 혼재, 커뮤니티 내부 피드백 문제 대신) 재능과 (상징 가치를 교환하는 최상위 시장과, 프리랜서 노동으로도 환전되지 못할 지망생·신진 작가의 예술 노동 문제 대신) 직군 내 소득 불평등으로 인한 ‘박탈감’을 문제 삼듯 노동구조 대신 노동의 형식성, 학벌주의 대신 지역성, 여성 혐오적 캠퍼스 문화 대신 인간관계를 부각한다. 전자가 아닌 후자에서 ‘갈등’을 만들어낸다.



* 성장 서사 관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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