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영화의 히키코모리, 좀비, 동성애 버전

<스위스 아미 맨> 리뷰

by 정신차려 moziri



과하게 상징적인 소재를 덮어쓴 사소한 주제의식

소재를 떼놓고 보면, <스위스 아미 맨>의 서사 자체는 무난합니다. 첫사랑 영화를 떠올리면 되죠. 실패한 첫사랑이나 짝사랑 그녀 때문에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좌절했던 주인공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살아갈 힘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이상향의 여성에게 가는 길에서 다른 여성을 만나 외로움을 극복하고 결국 그녀와 이뤄지는 것이죠. ‘그런 상대를 만날 수 있으니 결코 좌절하지 말자.’ 정도의 긍정적인 메시지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위스 아미 맨>은 여기에 특이함을 넘어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를 얹었습니다. 그 새로운 사람이 사실 시체거든요. 그는 호러 영화 속 좀비처럼 장르적이지 않고 사실적인 톤을 띱니다. 다니엘 래드클리프처럼 익숙한 얼굴이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32회 선댄스 영화제에서는 많은 관객들이 불쾌감을 표하며 중도 퇴장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에게도 관객들이 불쾌할 만한 설정이 부여돼 있습니다. 주인공 행크는 자발적인 이유로 사람 없는 해안가에 노숙하는 히키코모리이고, 방전 직전의 핸드폰 화면에서 웃고 있는 여성은 행크의 애인이 아닌 이웃의 기혼여성입니다. 전자는 시체에 대한 금기를 침범하는 듯하고, 후자는 이런 인물을 대변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갈릴 수 있죠. 감독도 그걸 의식했는지 대범한 소재 선택을 해놓고, 논란의 지점은 두 가지 방법으로 슬그머니 피해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시체는 금방 의식을 찾고, 말도 하고 자신의 여러 가지 쓸모를 증명해 보입니다. 식수도 제공하고, 무기로도 기능하니, 관객들도 시체를 짊어지고 가는 행크의 행동도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또 그런 과정이 마치 스톱모션처럼 과격한 동작으로 연출돼 있어서, 다크 판타지 같습니다. 관객들이 가질 시체 훼손에 대한 반발감을 잊게 하려는 것 같았어요. 두 번째로, 행크의 캐릭터를 숨기기 위해 후반부 이전까지 행크가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에 조난됐다고 착각하도록 연출했습니다. 쓰레기 구덩이 등 무인도가 아니라고 알리는 여러 힌트들을 배치하긴 했으나 다크 판타지의 일부라고 혼동할만한 정도였죠.


꼭 이 소재를 써야만 했는가 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는 시체와 무인도 조난까지 가져와서 풀어낼 만한 주제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소재가 상징하는 바는 잘 알겠어요. ‘도시 속 현대인이 느끼는 외로움은 심리적 조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행크는 그렇게 사람들 속에 조난 당한 히키코모리였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타인의 예측 불가능성을 감당하기엔 행크의 불안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 타인들과 다르게 자의로 행크를 떠날 수 없으며 행크에 의탁하는 존재인 매니는 행크의 친구가 되어 준다.’


차라리 <스위스 아미 맨>이 시 혹은 회화, 그림책, 뮤직비디오였다면 이런 메타포가 잘 작동했을 것입니다. 짧으니까요. 하지만 장편 영화에서 개연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메타포와 아이러니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자꾸 어긋나는 개연성은, 관객들이 인물과 상황에 몰입하지 못하게 튕겨내기만 합니다. 무인도 조난이라고 관객을 속이고 있다면, 최소한 주인공은 탈출을 시도해야 합니다. 물론 행크도 방귀를 통해 제트 스키처럼 바다를 활주할 수 있는 매니를 타고 무인도를 탈출하려 했습니다. 딱 타이틀이 뜨기 전까지만. 그러니 8분 분량의 단편 영화였다면 매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다 행크는 바다에 빠지는데, 정신을 차리니 다시 무인도의 해변입니다. 하지만 낙담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함께 떠밀려온 치즈 볼 봉지를 보고는 기뻐서 “안녕, 세상아!”라고 감탄사를 뱉어요. 그리곤 갑자기 치즈 볼을 만나게 해준 매니를 둘러메고 사람들이 사는 집을 찾겠다면서 산을 오릅니다. '태평양에 있는 무인도라며?' 주인공이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 건지 관객은 설득이 안 되기 시작합니다.


<셔터 아일랜드>식 심리 스릴러 다운 반전을 쉽게 택하는 작품들이 꽤 많아 보입니다. 그런 작품들은 보통 과하게 상징적이죠. 비유를 사용할 땐, 비유하고자 하는 원래의 것(원관념)과 그 비유(보조관념)가 잘 연결되는지, 보편적으로 이해될만한 비유인지 거듭 확인해봐야 합니다. 저는 <스위스 아미 맨>을 첫사랑 영화로 보고, 그 서사와 어울리지 않거나 과한 상징들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히키코모리의 외로움을 고독이라 불러도 될까?

외로울 때 읽는 시가 있습니다. 제 처지는 저 도마뱀 꼬리의 상황과는 비할 수도 없이 좋으니, 투정하듯 외로워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죠.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어떤 정서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쟁 피난민이나 전 국민에게 비난받는 유명인, 독방에 갇힌 죄수가 느끼는 것이야말로 ‘실제’ 감정이라고. 이 합리화를 거쳐도 외로움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하기 싫어도 이런 생각이 멈춰지지 않습니다.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문학동네 시인선 54,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감독은 ‘인셀’에 가까운 히키코모리 행크의 외로움을 무인도 조난 상황에 빗댑니다. 일상 속 외로움을 극적인 재난 상황에 빗대는 창작자의 태도는 종종 ‘자의식이 강하다’거나, ‘예술병 걸린 감독’이라는 조롱을 받기 쉽겠습니다. 특히 <스펜서> 같은 1인칭 심리 드라마는 이런 비난에 더욱 취약합니다. <스위스 아미 맨>은 그에 비해 반전을 통해 인물의 현실을 숨기고, 블랙코미디와 다크 판타지의 톤의 에피소드들을 보여주니 감상적인 느낌이 숨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반전을 그런 식으로 활용한 감독의 수가 읽히는 듯합니다. 감독의 비유가 설득력 있으려면, 도시가 얼마나 삭막하며 그 속의 사람들이 분열되고 있는지, 그런 사회 속에서 행크가 왜 외로울 수밖에 없었는지 영화를 보면서 심정적으로 납득 되어야 합니다. <미생>에서 인사청탁을 통해 대기업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청년이 겪는 설움을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죠. 보다 보편적인 인물이, 보다 일상적인 에피소드로 설명되는 경우입니다.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인 척 또한,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한 경험이 있는 보통 사람입니다. 택배 회사의 유능한 고위직이며, 약혼녀와도 사이가 좋죠. 그러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섬에 혼자 조난됐다가 4년 후에 자력으로 바다를 건너다 구조됩니다. 죽었다 살아 돌아온 척을 축하하기 위해 회사에서는 행사까지 합니다. 하지만 척은 본인의 부재에 개의치 않고 4년간 세상이 잘 돌아갔다는 걸 실감 하죠. 몸담았던 회사도, 사랑했던 사람들도. 약혼녀 켈리는 척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 박사 과정을 밟는 것도 포기하고 사고 관련 소식을 쫓았지만, 2년쯤 지나 그녀를 위로해 준 남성과 가정을 꾸렸고 척이 돌아온 현재는 딸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척도 그동안 무인도에서 생존 투쟁 중이었죠. ‘사람은 결국엔 혼자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에게, 다른 이와의 연결은 중요하고, 그게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에 큰 영향을 끼치지만 결국 자신의 인생을 운전하는 사람은 그 개인 혼자입니다. 척은 무인도에서 내내 켈리에게로의 귀환을 삶의 동력 삼았지만 결국 척을 살린 건 윌슨, 비행기 잔해, 그리고 그런 사물들을 의인화해서라도 살아보겠다는 척의 의지였습니다. ‘무인도 조난’이라는 소재는, ‘결국 나를 살게 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깨달음을 주려고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하지만 사회에 진입해 본 경험이 없는 행크는 ‘사랑이 나를 살게 할 텐데, 내겐 애인과 친구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여겨 외로워하는 단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주의의 과도기에 있는 지금, ‘히키코모리’는 사회 문제이고 그 인간상도 이제는 영화나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큼 보편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같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의 부정적인 버전 같아요. ‘외로운 개인은 외톨이이지만, 외로운 사회에서는 그로 인한 병들이 속출한다(?)’ 저 또한 고등학생 시절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종일 타인들과 부대껴야 했을 때는 히키코모리를 꿈꿨으나 점차 소속감을 원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대학 졸업 후 점차 의무적으로 저를 잡아두는 단체들이 사라지고 어딘가 소속되려면 돈을 지불하거나(대학원), 시험을 통과해야(채용) 했습니다. 돈을 지불한 고객이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아닌 나를 필요로하는 집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학교-대학교-회사처럼 그 이후에도 어떤 코스를 공신력 있는 누군가가 정해주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인간이란 사는 내내 주기적으로 그런 커뮤니티를 찾아 헤매야 하는 존재였음을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방황하는 건, 덜 헤맸기 때문인 듯합니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청년기를 맞은 이들은 더욱 열심히 헤매야 해요. 사람들을 묶어두던 힘이 약해졌는데 그걸 대체할만한 힘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에서 사망했는데 일주일간 어떤 동료도 몰랐다거나 공무원이 5년간 스피노자 공부를 하러 근무 시간에 자리를 비웠는데 들키지 않았다거나 도쿄 도심에서 고독사한 노인의 집이 몇 년째 팔리지 않고 방치됐다거나 하는 기사를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과도기적 사회에서는 고독이 아닌 외로움이 판을 치고 누군가는 그 외로움에 점점 심정적으로 반응하며 잘못된 진단을 내렸다가 더욱 분열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 외로움의 원인으로 타인을 탓하기 때문입니다.



인셀 버전의 ‘백마 탄 왕자님’ 판타지

행크는 죽기 전에 자신의 삶 속에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친구들이 가득한 파티,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이미지가 주마등처럼 스치길 바랐습니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행크의 갈망과, 매니에게 삶을 가르칠 때 드러나는 행크의 연애관은 인셀의 심리와 닮아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소속에 대한 갈망인 듯하다. 그런데 이런 갈망은 응집력이라는 부족적 감각을 전달하는 데 탁월한 커뮤니티에 의해서 완벽하게 충족된다. (중략) 인셀의 경우 섹스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그것을 ‘거부당한’ 데 대한 분노에 집중한다. 그렇다. 그 커뮤니티의 남성들은 이 세상(그리고 특히 여성 개인들)이 중요한 인권인 섹스권을 자신들에게 내어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신기하게도, 여성이 어째서 사악한 인간 이하의 존재인지 장황하게 불평을 늘어놓는 한편, 섹스가 너무 부족하다며 몇 시간씩 떠들어대는 수천 건의 대화에서 이 남자들은 여성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가 연애 관계의 실패와 관련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하는 듯하다.

- <인셀 테러> 35p


행크: 옛날엔 그런 (포르노) 잡지를 구하는 게 힘들었어. 인터넷이 뜨기 전엔 모든 여자들 이 더욱 특별했지. 여자들 한 명 한 명에게 러브스토리를 만들어줬겠지. (모델을 가리키며) 그녀 이름은 어쩌면 제시고, 길을 가다 그녀와 부딪히고, 발을 어루만져 주 고, 같은 집에 살고, 요리하고, 넷플릭스를 봐.

매니: 넷플릭스가 뭐야?

행크: 여자랑 데이트를 하면 영화관에 가. 그러다 그 여자랑 편한 사이가 되면 영화관에 집에서 넷플릭스를 봐.


행크의 판타지는 다행히도 난잡한 성생활이 아니라 한 여성과의 행복한 결혼 생활로 끝나긴 합니다. 하지만 잡지를 넘기다가 본 모델, 우연히 버스에서 첫눈에 반한 여성에게 가지는 호감과 인생을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일한가요? 행크가 여성과의 동반자 관계를 원한다기보다, (행크의 입장에서) 여성이 ‘제공하는’ 스킨쉽 및 대화, 배려를 원하는 건 아닐까도 싶었습니다. 성애와 친밀감을 구분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고, 실은 친밀감을 원하면서 여성과의 사랑을 뻔하디 뻔한 ‘성애’로만 묘사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엄마의 농담이 떠올라서 자위행위도 하지 않는다는데 성 기능 장애 때문에 여성 앞에서 위축돼 온 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그래도 이 매력 없는 행크에게 조금은 애정이 남는 이유는, 행크가 매니를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행크는 아기 인형을 종일 매달고 다니는 어린아이처럼 사지가 굳어있는 매니를 짊어지고 가면서 매니의 신체에 자신의 분노나 욕정을 풀지 않습니다. 여성이 아닌 남성 시체라고 해도 가학적으로 굴 여지는 있는데 말이죠. 또, 매니의 눈높이에 맞춰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모저모를 알려주고, 매니의 심장이 다시 띄게 하려고 가짜 러브스토리도 주입합니다. 그 러브스토리 속 새라에게 고백 연습을 하는 몽타주 씬은 정말 아기자기했어요. 미셸 공드리의 스톱모션, 아리 애스터의 오컬트 소품들이 연상됐죠. 어쨌든 이런 점에서 행크는 인셀과는 다릅니다. 인셀들이 상대방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소유욕을 가졌다면, 행크는 상대방의 마음을 예측할 수 없는 게 두려워서 관계를 회피해온 것처럼 보입니다. 행크는 아마도 아기 인형처럼 자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매니를 돌보면서 안정감을 느꼈을 겁니다. 또한, 타인에 대한 공격성보다 자신에 대한 피학성이 훨씬 컸으니 애당초 여성을 공격하지 않고 혼자 자살을 기도했겠죠.



매니가 여자가 아닌 이유

하지만 시체 친구를 행크 옆에 붙여준 감독의 저의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캐스트 어웨이>의 배구공 윌슨은 섬 원주민이나 고양이가 아니라 공산품이었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주인공 척의 고독한 정신 상태를 보여주죠. 그는 윌슨 말고도 모든 사물을 의인화하는 화법을 구사하는데, 그렇게 해야 고독이 견뎌지기 때문입니다. 폭풍우에 날아가 버린 뗏목의 돛에 대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윌슨에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버렸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바다에 떨어진 윌슨은 척의 애원과 상관없이 그냥 떠내려가 버려요. 어떤 판타지적 허용도 없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매니의 작동 원리는 선택적입니다. 판타지적 허용에 별 규칙이 없어요. 매니는 목도 못 가누지만 물과 불을 뿜고, 액션을 합니다. 어디까지가 행크의 상상이고, 진짜인지 구분도 정확히 안 되어 있습니다. 행크가 매니를 계속 데리고 가게 하려는 목적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더라면, 생체 징후를 보이기만 해도 됐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독이 이 다크 판타지로 무얼 보여주려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매니가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전사나 좀비가 아니고, 수동적이면서도 여러 기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가부장 사회의 ‘가정주부’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매니는 원래 여자 시체로 설정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야 굳이 시체로 설정한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 같으니까요. 한 번도 여성을 사귀어 본 적 없는 행크와 교류해야 하니, 기억을 잃어서 경계심도, 편견도 없는 여성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매니는 행크의 의견에 수긍하고, 가르침 받아요. 움직임이 제한돼 있다는 점에서는 버튼을 누르면 정해진 말들을 뱉는 인형이나, 섹스 토이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분절된 사물에 여성의 인격을 부여하려 하거나, 실제 여성을 사물 취급하곤 하니까요. 하지만 여성 시체로 설정했을시, 행크가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이미 현실에서 발생한 많은 성범죄를 상기시킬 수 있으니 남성 시체로 결정했던 것 같아요. 의식이 없는 여성을 강간하거나, 죽은 여성을 강간하거나, 죽을 때까지 강간한 사건은 꽤 빈번합니다. 어쨌든 매니를 통해 꿈꾸던 여성과의 데이트를 재현하는 히키코모리의 이야기 안에서, 여자 주인공 역할에 해당하는 매니를 남성으로 설정하여 논란을 빗겨 가려 한 것만 같아 비겁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차라리 소재만 놓고 본다면, 저였다면 반쯤 죽은 생명체를 통해 죽음에 대해 고찰하는 영화를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초현실주의자의 관점에서! 고백, 데이트 시뮬레이션을 하는 게 아니라 매니의 기원을 찾아가는 데에 집중했을 것 같아요. 매니라는 특이한 캐릭터를 갖고도 관습적인 사랑 표현에 머물렀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가여운 것들>과 비슷한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이게 바로 남자 감독들의 한계가 아닐까 싶었어요. 이성애의 프레임을 벗어나서 관계를 이야기하길 어려워합니다. 그쪽으로는 상상력이 발전하질 못했어요. 저는 매니와의 드라마를 더 끌어내주길 바랐습니다. 매니가 입을 떼기 전까지의 침묵이 한 시간이 넘어갔더라도 저는 참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연극을 하고 모험을 벌이는 몽타주가 길어질수록 그것대로 굉장히 좋았지만, 서사를 만들어내기가 어려워서 편하게, 오락적인 몽타주로 퉁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지만, 감독의 다음 영화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감독에게 어떤 발전이 있었는지 기대를 품고 봐야겠습니다.


2024년 10월 2일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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