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한 자기 혐오자의 비합리적인 자살, <더 웨일>

by 정신차려 moziri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답지 않은 찰리와 주변인들

<더 웨일>은, 관객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품었던 의문이 점차적으로 풀려 가는 전개입니다. 타이틀 이전 인트로에선, 누군가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에서 하차하는 풍경을 버드 아이 뷰로 비춥니다. 후에 그게 토마스라는 걸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장면 자체에는 정보가 없죠. 그 뒤, 온라인 수업 스트리밍 화면에선 남자가 글쓰기 수업 강사라는 정보를 줍니다. 이후 ‘타이틀 인’되고, 첫 장면이 시작됩니다. 어두운 집 안에서 거구의 남자가 게이 포르노를 보며 자위 행위를 하다가 숨을 헐떡이고 있습니다. 관객은 그가 쾌감을 즐기는 건지 아파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허겁지겁 A4용지를 집어 들고 글을 낭독하는 것에선, 그가 자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나 싶다가도, 사정을 안 하는 걸 보니 행위는 아직 이어지고 있으며 글의 저자나 모비딕 혹은 감상문 자체에 이상 성욕을 느끼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 젊은 남자가 갑자기 집 안에 들어와서 119를 부르자고 하죠. 그제야 남자가 긴급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관객도 알게 됩니다. A4용지에 적힌 모비딕 감상문이 죽음의 순간에 듣고 싶었던 글이라는 것도요. 이윽고 간호사 리즈가 들어와서 상황을 정리합니다.


그 글을 누가 쓴 건지, 왜 찰리는 위기의 순간 구급차를 부르지 않는 거고, 간호사인 리즈조차 찰리의 뜻을 존중하는 건지. 리즈와 찰리는 연인인 건지, 찰리는 왜 토마스를 바로 내쫓지 않은 건지 영화가 진행되며 서서히 밝혀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계속 인물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의료 보험 미가입자인 찰리가 감당하기에 미국의 의료비는 정말 비싸고, 찰리는 엘리에게 물려줄 유산을 한 푼도 쓰고 싶지 않으며, 앨런 사후에 찰리가 삶의 의지를 잃고 고혈압을 통해 자살을 꾀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극 내내 성실히 제공됨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찰리는 직장을 통해 의료 보험에 가입되지 못한 걸까요? 시니컬해 보여도 사실 모두를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찰리가 왜 자살을 택할까요? 이 찜찜함은, 대본의 불친절함이나 인물 설정의 허술함 따위의 요인 때문이 아니라, 찰리라는 인물의 복잡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더 웨일>의 감상은, 초연한 자기 혐오자가 비합리적인 자살을 택하는 과정을 이해해가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초연한 영화

디데이를 세는 것처럼, 자막으로 요일이 표시됩니다. 보통 그런 장치는 영화 속에서 긴박함을 조성하지만 <더 웨일>에 그런 긴장감은 없습니다. 사망 전 5일간 찰리는 자위도 하고 까마귀한테 밥도 주며, 늘 먹던 서브웨이와 피자를 먹습니다. 손에 묻은 기름을 면티에 쓱 닦긴 해도, 솔로 몸을 잘 씻고 면도도 합니다. (그래도 체취가 있을 텐데) 리즈와 전 부인 메리는 찰리의 뱃살에 기대어 안정감을 찾습니다. 또, 엘리가 아파트에서 냄새가 난다곤 했지만, 크게 어질러져 있지도 않습니다. 찰리는 평상시처럼 살아가는 듯 보여요. 리즈가 하임리히법으로 음식물을 뱉게 하고 서로 놀라 화를 내고 운 뒤 어떤 조치가 취해질 것 같았으나, 그 후에 둘은 티비 쇼를 보다가 리즈는 집에 가고 찰리는 잠이 듭니다. 리즈는 마치 부모님이 밤낮 바뀐 자녀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정도의 대처를 하죠. 그러니 찰리는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거나, 차분히 끝맺음의 의식을 행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합성 이미지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 번째 날>에서는 암에 걸린 주인공이 재난 상황에서 대피하지 않고 아빠와의 추억이 있는 피자집을 찾아가 삶의 마지막 사치를 누립니다. 피자집에 가서는 감격해서 난리 부르스를 추죠. 하지만 찰리는 딸 엘리를 불러서 유산을 정리하긴 해도, 적극적으로 엘리와 자신 사이의 응어리를 풀거나 해명하려는 의도가 없어 보입니다. 이를 통해 제가 판단한 찰리는, 이룰 걸 다 이뤄봐서 삶에 초연해진 팔십 먹은 현자 같은 사람이입니다. 그런데 그런 초연함이 찰리에게서도 풍기고, 제작진이 사건을 구성하고 조연들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느껴집니다.

그 덕분에, <더 웨일>은 만성 불안장애를 앓는 늙은 남자가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스릴러로 연출한 <보 이즈 어프레이드>(아리 애스터)나 <이제 그만 끝낼까 해>(찰리 카우프먼)같은 영화와는 구분됩니다. 세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잡념들을 말로 풀어내길 즐기는 시니컬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비슷해요. 자의식이 강한 거죠. 하지만, <더 웨일>의 찰리는 그런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사람이었을지 그들의 입장에서 고찰합니다. 찰리 카우프먼과 아리 애스터의 주인공이 불안에 젖어 자신의 심연을 탐색하는 것에 몰두해 있을 때 말이죠. 전 부인 메리의 말처럼 찰리가 ‘낙관주의자’로 보이는 이유는 찰리가 착하다거나 정말 ‘원영적 사고’라도 실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폭발하는 자의식을 이제는 잠재울 줄 알고 타인의 장점을 찾아낼 줄 아는 초연한 인물이라섭니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스틸컷

<더 웨일>은 대본과 연출의 방향도 초연합니다. 찰리의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제3자의 시선으로 보듯 담백하게 연출했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음악이 나오며 찰리가 폭식을 하는 후반부의 이질적인 장면를 제외하면요.) 심지어 찰리보다는 토마스나 엘리 같은 조연에 더욱 포커스를 두는 것 같기까지 합니다. 톤앤 매너도 사실적이죠.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멍한 표정이나, TV에서 흘러나오는 선거 방송, 군데군데 부서져 있는 아파트 복도 테라스, 침침한 집안 풍경이 어떤 실제적 체험을 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격양된 부분이 없는 그 담백함 때문에 영화에 특색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찰리 카우프먼이나 아리 애스터가 오로지 주인공의 자의식에 집중해 죽음을 심상적 이미지로 연출하는 데에 비해, <더 웨일>은 건조한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각 영화의 장르는 각각 스릴러/호러와 휴먼 드라마로 나뉘게 됩니다. 또 여타 연극 원작의 영화처럼 말싸움의 티키타카를 지향한 것도 아니라서 구성상 적재적소에 사건을 만들어놨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처지는 감이 있었어요. 성실하고 사려 깊은 영화지만 그 노고에 비해 제가 이 영화에 크게 감응하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사려 깊은 영화보다 자기중심적인 영화가 인상 깊을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했고요.


조연 비중 조절 실패로 인한 두 가지 메시지의 혼재

① 사람의 삶엔 연인 외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사랑보다는 오히려 유대감이 사람을 구원한다.

② 진실해야 한다.

<더 웨일>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메시지를 일깨우는 조연들이 나뉘어 있죠. (앨런과 함께) 토마스와 리즈는 ①, 엘리는 ②를 전달하기 위해 기능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엘리의 이런 튀는 캐릭터성이 ①을 전달하는 것을 방해했던 것 같습니다. 제작진이 더 중점을 두고 싶었던 메시지는 ①인 것 같은데 말이에요. 물론 엘리가 ①을 일깨울 수도 있었지만, 엘리는 ‘아빠의 부재로 인한 결핍이 큰 딸’을 넘어서서 자신만의 진실성을 지닌 개성 있는 인물로 활약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엘리가 주인공인 성장물을 보고 싶었고, 재미를 위해서도 그 편이 나을 거라고 느꼈지만, 차라리 엘리를 등장시키지 않고 엘리 또래인 토마스를 통해 엘리를 연상시키는 식으로 조연의 수를 줄이고 한 가지 메시지에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제작진은 저 두 가지 메시지가 인과관계나 상하관계로 묶인다고 여겼을 수 있지만,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찰리 카우프먼의 영화는 내내 떠벌거리며 5분마다 다른 논제를 던지지만, 그 잡스러운 대화들이 스쳐 지나가서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지진 않아요. <더 웨일> 속 개성 있는 조연들은 자꾸만 시선을 낚습니다.

또, ②는 사건이 아니라, 주로 찰리의 말과 이와 모순되는 태도를 통해 드러납니다. 즉, 찰리의 캐릭터성을 보여주는 정도인데, 유독 대사로 자꾸 강조되니 작품의 메시지인 ①과 혼동됩니다. 더욱이, 적지 않은 관객들이 그 때문에 찰리를 이중적인 인물로 바라보게 되죠. 진실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캠을 켜지 못하는 찰리의 상황은 분명 이중적이긴 하나, 그게 찰리가 진실하지 못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건 아닙니다. 찰리가 사람들 각각에 보이는 진실함의 종류나 정도가 달랐을 뿐이죠. 앨런과의 사랑엔 진실했고, 앨런을 구원하지 못한 자신의 분수에 대해 자아 성찰도 했습니다. 늦어지긴 했지만, 엘리에겐 죽기 5일 전에 진심을 보였고요. 엘리의 인신공격성 폭언에도 엘리와의 만남을 중단하지 않았어요. 수강생들에겐 자신의 외양을 공개하긴 꺼렸지만, 결국엔 캠을 켰습니다. 오히려 찰리는 자신과 깊게 관계 맺지 않은 토마스나 피자 배달부에게 뜬금 없이 피해의식을 드러냅니다. 토마스에겐 내가 역겹냐고 물으며 날카롭게 감정을 표출했고, 피자 배달부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는 분노하여 폭식을 했습니다. 찰리가 성애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대할 때의 차이처럼도 느껴졌습니다.


연인과 공동체의 차이, 사랑과 소속감의 차이

찰리는 동성 파트너였던 앨런에게 제일 진실했습니다. 이성애 ‘정상’ 가족을 이루고 살다가 가정을 정리하고 앨런과의 미래를 택했으니 말입니다. 또, 앨런처럼 함께 있어 주진 못했지만, 찰리는 엘리 또한 앨런만큼 사랑했던 것 같아요. 앨런의 인생에선 주체로 역할 했고, 엘리의 인생에선 객체로 기능 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랑엔 정말 여러 가지 스펙트럼이 있지만 차치하고, 연인 간의 로맨스와 가족 간의 사랑을 비교해 볼 때, 긴밀한 연결을 추구하고 서로 날것의 모습을 터놓고 교류하고 싶어지는 로맨틱한 사랑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끌리는 이성에게 부모의 사랑을 원하진 않으니 말이에요. 날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기회나 자본을 양보하고 멀리 떠나겠다고 하는 상대보다, 지지고 볶고 옆에서 살겠다고 하는 쪽이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나요? 반대로 가족은 끌림의 대상은 아니지만, 동일시의 대상입니다. 가족은 ‘나’의 범주 안에 있어서, 제 시간이나 재물을 주어도 아깝지 않지만, 그들의 삶에서 제가 주요 인물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어요. 그들의 행복 여부가 더 중요하죠. 반면에 연인의 삶에서 제가 주요 인물이 아니라면 그를 더 만날 이유가 없을 것이고요. 찰리도 이와 비슷한 마음으로 앨런과 함께하고 엘리를 멀리했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찰리는 연인으로서의 제 역할은 과대평가하고, 아빠로서의 역할은 과소평가했습니다.

다시, 연인 간의 로맨스는 ‘사랑’으로, 가족 간의 사랑은 ‘소속감’이라고 (단순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랑과 소속감 중 어떤 감정을 중요시하는지, 어떤 영향을 받는지는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소속감이 사랑보다 자신을 성장시킨다고 느낍니다. 사랑은 종종 고독을 극대화해서 멜랑콜리한 자아 성찰을 돕긴 하지만, 소속감은 개인에게 안정을 줄 수 있습니다. 앨런과 토마스는 소속감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족에게서 버려지고, 가족이 깨진 것에 대한 아픔이 있죠. 이들에겐 공동체의 영향력이 큽니다. 반대로 찰리는 소속감보다는 사랑으로부터 구원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니 앨런과 살게 된 이후 붕괴된 원래 가정의 잔해를 좇지 않았겠죠. 앨런이 죽은 이후엔 조력자 리즈와 딸, 전 부인의 애정, 토마스와 배달부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삶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리즈는 소속감을 중시하진 않으나,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람 간의 유대감을 중시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가길 거부했으며, 현재도 간호사로 일하며 죽은 오빠의 연인이었던 찰리에게 도움을 주는 데서 안정감을 찾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찰리 – 공동체가 주는 소속감보다 사랑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리즈 – 교회 가길 거부했다. 연인도 가족도 아닌 찰리를 도우며 존재감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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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 사랑 못지않게 가족, 교회에의 소속감이 중요하다.

토마스 – 가족에게서 버려진 것에 아파한다.

어떻게 보면 파트너였던 앨런과 찰리는 미국인 내 가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진보적 가치와 다양성,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이와, 보수적 가치인 민족·가족을 여전히 중시하고 기독교를 믿는 이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더 웨일> 속 인물들은 서로 갈등하되, 배척하지 않습니다. 토마스가 결국 고향의 가족에게 복귀하는 엔딩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죠.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학력이 낮은 부모 세대는 크리피한 존재로, 소도시에서 고등학교 청소노동자로 일하며 혼자 늙어가는 아들 세대는 비참한 존재로 형상화한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낯설게 보기’식 연출과는 달라요. 이런 점에서 역시 <더 웨일>은 사려 깊은 영화가 맞습니다.


자신을 소외시킨 공동체의 인정을 갈구하는 마음

나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집단으로부터 애정을 받고자 하는 인간의 인생은 정말 기구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마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소속감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으니까요. 하지만 개인주의자인 줄 알았던 저는 국가나 교회처럼 전통적인 집단의 애정이 필요하지 않았을 뿐, 컬트 집단에서의 인정엔 굶주려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개인주의자들은 단지 심리적 기반이 가족, 친척, 지역에 있지 않고, 보다 범위가 흐릿한 공동체에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소속감을 느끼고자 하는 집단이 아예 없을 수는 없습니다.

또, 저는 소수자는 당연히 보수적인 가치나 공동체보다 자신의 성지향성이나 진보, 자유와 같은 가치를 중요시할 줄 알았습니다. 앨런은 복잡한 인물입니다. 앨런은 찰리와 파트너로 살면서 자신의 중요한 부분인 성 지향성을 지켜냈으나 가족과 교회에게 거부당했다는 아픔 때문에 결국 자살했으니까요. 앨런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다가, 몇 달 전 읽은 대법원 판결 기사를 떠올렸습니다.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이다.’는 판결이었고, 동성 (사실혼) 부부는 그 판결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몇 년간 부부로 살았는데 법은 그 시간을 손쉽게 지웠다. 마침내 내 배우자가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서류 속 내 이름 밑에 적힌 것을 보니 우리가 부부로 인정받았다는 기분에 감격스럽다.’는 뉘앙스였죠. 이성애자들 사이에선 결혼 제도의 밖에서 관계를 실험해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점차 커지고 있다고 느껴왔는데, 반면 동성애자는 제도의 인정과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게 아이러니했습니다. 어쩌면 앨런도 저들과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 번 제도에 속했다가 벗어났으며, 공동체가 주는 소속감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인 겁니다. 그러니, 리즈가 토마스에게 ‘찰리는 여행하며 선교하다가 고향에 돌아가 애 줄줄 낳고 살아갈 너와는 달라!’라고 했던 말은 틀렸습니다. 찰리나 리즈와 같은 개인주의자들은 그런 식으로 타인의 절망감을 간과하기 쉽고, 그들이 상처받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죠.


토마스를 통해 앨런을 복기하는 찰리

찰리는 깊은 관계인 엘리나 리즈가 아닌 토마스에게 격양된 감정을 표출했습니다. 자기 혐오도 드러내고, 앨런에 대해서도 질문했습니다. 토마스가 계속 종교와 앨런을 언급하며 찰리를 자극하긴 하지만, 그보다도 토마스는 극 중 누구보다 자신 안에 확실한 답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토마스는 앨런이 찰리와 함께 하기로 선택해서 신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달리 말하면, 극 중에서 제일 강단 있어요. 대마초를 피우다가 가족에게서 쫓겨나 선교 단체에 보내졌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신념 때문에 싸우고 독립하여(?) 선교 활동을 다닙니다. 엘리에게 뉴라이프가 아닌 것을 들킨 후에는 자신의 일대기를 술술 털어놓고, 끝내 엘리 덕분에 가족에게로 복귀합니다. 잘 짜인 성장물의 주인공처럼, 모험을 끝마치고 복귀하는 것만 같죠. 그런 토마스는 찰리나 앨런과는 너무 다른 인물이지만 찰리는 토마스의 귀환에 매우 기뻐합니다. 찰리는 한 기독교도 소년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의 삶에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찰리의 죽음에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토마스를 통해 앨런과 자신이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임을 깨닫고도 끝내 자살해야 했을까요? 느슨한 연대, 유사 가족을 통해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을 꿈꿀 수는 없었는지 큰 의문이 듭니다.

<더 웨일> 속 뉴라이트 선교사 토마스



우리 아빠를 떠올리며

저는 부모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고,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자식들이 신기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사랑했지만, 데면데면했거든요. 인간으로서의 부모님께도 그다지 관심이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소속감과 사랑, 로맨스와 가족 간의 사랑을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바깥에서 부모님 나이대의 어른들과 교류하면서 부모님께도 자아가 있고, 자식에 대한 애착과 별개로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다는 걸 알아갔습니다. 예전에는 부모님의 어리석은 면이 보이면 눈을 가리고, '내가 모른 척할 테니까 빨리 해결하라'는 식으로 굴었다면, 지금은 ‘저 사람 성격이 원래 저렇구나.’라고 타협하고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합니다. 이십대 후반인 이제야 이런 마음가짐을 했는데, 엘리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빠 찰리를 한 사람의 개인으로 대한다는 점이 참 대단했어요. 엘리는 찰리를 규정짓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마이너리티의 요소를 가진 본인 아빠에 대한 생각 정리를 이미 마친거죠. ‘왜 그렇게 살이 쪘어?’ ‘안에서 죽는 중인 거 아니면 안 들어갈 거야.’ ‘게이가 딸이 있어서 놀란 거야, 누군가 파묻힌 그의 고추를 찾았다는 것에 놀란 거야?’ 촌철살인의 언어들입니다. 저였다면 거구의 몸을 하고 탈모가 온 늙은 아빠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져서, 똑바로 보는 일조차 어려웠을 겁니다. 아빠가 게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10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는 양성애자였나 게이였나’하는 고민에서 표류하고 있었을 테고요. 엘리의 묘하게 효율적인 대화법도 매력적입니다. 상대를 자극해서 단시간에 상대를 파악합니다. 보는 사람마다 잡고 선교 활동을 펼치던 토마스가 엘리를 보자마자 냅다 줄행랑을 치는 장면에선 토마스가 부끄러움을 타는 소녀 같아서 재밌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젠더가 스위치 된 것 같아요. 어쨌든, 나서부터 솔직한 엘리는 찰리처럼 비겁함의 대가로 타인을(엄마인 메리를) 희생시키지 않고 진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응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sns에 올린 개와 까마귀를 엘리가 죽인 것이 맞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2024년 9월 9일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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