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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Apr 29. 2023

[호모룩스 이야기-10] 헤어질 결심, 마침내!

[호모룩스 이야기-10]      



                                                      헤어질 결심마침내!                    




                                                                                                                        시아





               

  매주 금요일은 내리 여섯 시간 수업이다. 이번 주 마지막 두 시간은 보강까지 잡혀 있었다. 단 일 분도 쉬는 시간 없이 두 시간을 꼬박 채워야 했다. 수업 도중, 고된 일정을 소화해낸 나한테 상을 줄 거라며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앞에 앉은 남학생이 물었다. 어떤 상을 주실 건가요? 

  나는 대뜸 영화를 보겠다고 했다. 우와~ 라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거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냥 집에서 영화 다운 받아서 볼 거라고 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학생이 어떤 영화를 볼 거냐고 하길래 추천해달라고 했다. 학생이 영화 제목을 말했을 때, 나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거, 개그맨들이 하는 유행어 아니었나요?     



  실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사랑 타령하는 멜로가 뻔할 테니까. 막상 귀가해서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다 보니 밤 아홉 시 반을 훌쩍 넘겼다. 피곤이 몰려와서 그냥 자리에 누울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아주 작은 약속이지만,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다운  받을 영화를 몇몇 검색하다가, 나를 불러세운 학생의 말을 떠올렸다. 글쓰기 수업 과제가 있어서 그 영화를 보고 썼는데 칭찬을 받았다고도 했다. 다운을 받고 나서 보니, 하아~ 러닝 타임이 138분이었다. 다 보고 나면 열두 시가 넘을 텐데, 내 몸이 상을 받기에 적합한지 자신이 없었다. 밤에 뭘 먹으면 좋지 않을 텐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깎아놓은 배를 꺼내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버텨가며 영화를 만났다.      



  워낙 알려진 영화고, 개봉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리뷰라니, 뜬금없다. 나는 단지, 현대인이면서 아닌 척하고 싶은 현대인인 나한테 독백하듯 이렇게 말하고 싶을 뿐이다. 똑똑하고 한 치도 손해 보지 않고, 이익과 손해를 잘 따져서 살고, 야무지고 논리정연한 전형적인 좌뇌형 인간인 정안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사리 분별과 판단이 뛰어나고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지만, 자신이 맡은 살인사건을 지루한 삶의 자극하는 유일한 돌파구로 여기는 형사 해준이다. 추락사한 남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해준과 만나게 된 중국인 서래가 있다. 그녀를 심문하면서 해준은 묘한 끌림을 가진다. 서래를 의심하며 잠복 수사를 하고, 결국 서래가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해준은 유일한 증거물인 휴대폰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서래는 이 말을 녹음해서는 수시로 듣는다. 해준과 헤어진 뒤로도, 다시 만나서도 듣고 또 듣는다. 새로 결혼한 남편한테 들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듣는다. 그녀는 이 말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인다. 나중에 재회한 해준한테 서래는 이렇게 말한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첫 남편과 두 번째 남편의 죽음 모두 서래가 꾸민 짓이었다. 당신을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것밖에 없는데 어떡하냐고 하지만, 그녀는 파렴치하다. 동시에 너무나 사랑스럽다. 위험한 피의자인 서래한테 해준은 이렇게 말한다.      



  “서래씨가 나하고 같은 종족이란 거, 진작에 알았어요.”

  ‘같은 종족’은 ‘에드워드 호퍼’적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쓸쓸하고 공허한 고독의 그림자를 화면 가득 남긴 20세기 미국화가. 그의 그림 안에서 자외선 소독기 같은 햇빛과 바싹거리는 사물들을 만날 수 있다. 모든 오브제들은 만지면 그대로 부서지고 말 것 같다. 심지어 바다마저도 물기 하나 없이 정지한 채이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삶이다. 부러 열정적으로 사는 척하면서 자부심에 겨워하는 이가 해준의 처, 정안이고 대부분의 현대인이다. 조금이라도 이치에 맞지 않거나 납득이 안되면 가차 없이 내팽개친다. 사실, 무미건조한 삶을 그렇다고 인식하는 것은 ‘같은 종족’만이 할 수 있다. 다른 종족이라면, 이럴 것이다. 외롭다고? 웃기지 마.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 끌어당김 법칙도 몰라? 외로움은 외로움을 끌어당길 뿐이야.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에도 모자라는 세상이야. 그저 활기차게 살면 그만이야! 고독? 웃기고 있네. 피트니스센터라도 다녀!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자꾸 엉뚱한 생각이 들지!      

 


  ‘같은 종족’인 서래는 한국말에 서툴다. 서툰 만큼 진지하다. 간신히 발음하는 말들 모두에 방점이 찍힌다. 오랜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을 재우기 위해 호흡을 맞춰준다. 바다로 들어가서 눈도, 코도, 생각도, 감정도 없는 해파리가 되는 상상을 하게 한다. 이런 감수성이 에드워드 호퍼족인 해준을 촉촉하게 했다. 직업의식에 투철한 해준은 ‘마침내’ 서래 앞에서 무장해제 된다. 서래는 그런 해준을 보며 오랫동안 돋아 올렸던 마음의 가시를 내린다.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일 형사가 품위 있어서.”

  서래의 말에 해준은 묻는다.      

  

  “경찰치고는 품위 있다 이건가요? 한국인치고는? 남자치고는?”

  서래는 답한다.      

  

  “현대인치고는.”     



   그렇다. 이 영화는 현대인에게 품위 있는 질문을 던진다. 영악하고 현실적인 정안,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살인사건을 자극제로 삼는 해준, 마지막 순간까지도 죽음을 먹어치우는 서래, 당신은 어느 쪽인가? 그 어느 쪽도 아니라면, 당신은 기꺼이 현대인이면서도 현대인이 아닐 수 있는가? 구태의연한 삶과 ‘헤어질 결심’으로 매 순간 삶을 제대로 ‘붕괴’시킬 감수성과 감성을 가지고 있는가? ‘마침내!’







  호모 룩스(HOMO LUX)는 빛으로서의 인간을 일컫습니다라틴어로 인간이라는 호모(HOMO)’와 빛인 룩스(LUX)’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 ‘호모룩스 이야기는 치유와 결합한 시사와 심리예술과 문화에세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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