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만남: 깨어나는 삶 --- 1

by Sia


열한 번째 만남: 깨어나는 삶



치료실로 들어서는 라의 표정은 묘했다. 편안함과 아쉬움이 골고루 묻어 있었다.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 보인다고 하자 라는 놀란 듯 물었다.


-그런 게 보이세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내담자와 12회기를 진행한다. ‘특별한 경우’란, 정신적인 문제가 심각하거나 만성인 경우다. 그럴 때는 그 곱절, 또 곱절로 진행하기도 한다. 보통 11회기 정도가 되면, 프로그램을 마무리할 준비를 한다.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도 비슷해서 얼마간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헤어지는 것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 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함께 나누면서 다음 회기를 대비한다. 마지막 회기가 되면, 건강한 헤어짐과 새로운 시작을 향한 축하와 축복을 주고받게 된다.


라도 어김없이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따라 라는 좀 이상했다. 뭔가 주저하는 듯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얘기를 해보라고 했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 긴장조차 일부러 눌러 앉히려고 애쓰는 듯했다. 왼쪽 엄지손가락을 다른 쪽 손으로 감싼 채 쥐어짜고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보다 못해서 내가 선수를 쳤다.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이 있군요.


라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나를 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떨궜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실 그렇다는 의미로 보였다. 이대로 넘어가면, 프로그램의 효과가 엎어지게 될 수도 있다. 미처 말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과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말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은 나도 모르는 무의식적 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그게 무엇인지 자신도 모른 채 그렇게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당장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다. 세월이 지나서 말하지 못했던 것을 깨달을 때가 올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내적 성숙의 과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은 좀 다르다. 그것은 스스로 억제해서 할 말을 다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죄다 다 털어놓아야지 상담 치료를 제대로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인생 모두를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털어놓겠는가. 다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자신의 인식이 중요하다. 그런 게 있다면, 말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함으로써 빚어지는 불안 때문이다. 상대방의 반응에 대한 염려, 자신의 억압이 해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입을 닫게 만든다. 라가 지금,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말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할 말이 있다면, 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만 얘기했다. 이제 낚싯대를 드리우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과제는 날마다 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적어왔어요.


라가 공책에 적은 글을 보여주었다.


“에너지 메시지, ‘괜찮아, 잘했어, 잘할 거야’를 꼬박꼬박 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밤에 자기 직전에, 정오쯤에. 특히 아침에 눈 뜨자마자 ‘감사합니다’를 해야 해서 그것부터 시작하고 에너지 메시지를 했다. 도도새가 나를 안아주면서 메시지를 해주는 것은, 저녁 열 시경이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와서 씻고 방에 들어왔을 때다. 처음에는 이렇게 꾸준하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이제 멋진 습관이 들어서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다.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마음의 중심에 옥빛이 있고, 도도새가 있다.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있다고도 여겨진다. 그렇다면 신을 믿는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신이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낀다. 신의 곁에 아빠도 계신다. 웃으면서 나를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감사하다고 할 때, 신과 아빠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라가 아빠를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라는 아빠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낚싯줄을 문 물고기가 예사로운 크기가 아닐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신 건, 실은 작년이었어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해서 죄송해요. 아빠 얘길 꺼내기 싫었거든요.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엄청 더 발작을 일으켰어요. 저를 때리고 욕을 하고 그런 횟수도 너무 많아지고요. 그냥 제가 죽어버리는 게 훨씬 나을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자살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실은 아빠가 간밤 꿈에 나타났어요.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으로 나타나신 거예요.


내 아버지는 쥐약을 먹었다. 어머니의 악다구니가 정도를 넘어섰던 거였다. 한창 사업으로 돈을 잘 벌던 아버지 앞에서만큼은 어머니는 욕을 하지 않았다. 보증을 잘못 서서 아버지 앞으로 빚이 왕창 넘어와서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아버지는 용달차를 몰며 이삿짐 나르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쯤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출근하면 뒤에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일을 관두고 아버지 대신 언니가 가계를 책임져야 했을 때부터는 대놓고 아버지 앞에서 욕을 해댔다. 머저리, 미친놈, 버러지만도 못한 놈.


아버지는 언니의 피아노 학원 차를 운전했는데 늘 신경질적이었다. 용달차를 했을 때도 그랬지만, 불평이 가득 묻은 얼굴이었다. 아이들이 내리면서 하는 인사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는 자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대놓고 욕설을 내뿜는 어머니의 지저분한 입을 넋을 놓은 채 바라봤을 것이다. 삶이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허무한 것이라도 여겼을 것이다. 모든 것을 두들겨 부수거나 다 태워버리고 싶던 스물한 살에 쥐약 소식을 들었다. 자살은 내가 하려던 거였다. 내가 하려던 영역에 아버지가 침범하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위세척을 하고, 며칠 입원했던 병원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퇴원하고 온 아버지 곁에도 잘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시 언니 학원 차를 운전했고, 어머니는 다시 욕을 해댔고 모든 것은 반복되었다. 얼마 가지 못해 아버지는 위암 진단을 받았고, 어머니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때, 수년 전 아버지 사업을 망하게 한 장본인이 목사가 되어 나타났다. 빚을 갚는 대신 복음을 전했고, 웬일인지 나를 뺀 온 가족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를 다녔다. 그 사실을 안 아버지는 내 뺨을 갈겼다. 너, 나중에 엄마 아빠 제사 안 지내려고 그러지? 못 된 것! 아버지가 나를 구타한 것은 열 손가락 안에 드는데, 그날이 손가락 하나를 굽히게 만든 날이었다. 그 이후 고등학교 때 친구를 따라 2년 가까이 교회를 다녔는데 그때도 언니한테 들켰다. 언니가 어머니한테 일러줘서 온 가족이 알게 되었고, 그때도 난리가 났었다. 악다구니와 욕설을 퍼붓던 어머니는 나를 찢어 죽이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를 뜯어말려놓고는 이제 와서 모두들 교회를 다니겠다고 난리였다. 그런 행태가 너무나 질려서 어이없어하며 보고 있었다. 교회를 안 가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대번에 욕을 퍼붓고 고함을 질렀다. 졸지에 나는 아버지의 건강회복을 기도하지 않는 악한 년이 되고 말았다. 마음을 짓밟을 대로 짓밟다가 함부로 이리저리 끌고 가려는 어머니로 인해 나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위암 수술을 받고 위를 반 이상 떼어내 버린 아버지는 다시 학원 차를 몰았다. 어머니의 욕은 다시 반복되었다. 주일마다 교회를 나간다고 법석인 것도 반복되었다. 나는 억지로 끌려갔다. 모든 것이 못마땅했지만, 독립할 힘이 아직은 부족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머니가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이상한 말을 하더라. 나한테. 글쎄. 사랑한다고......”


어머니는 생전 그런 말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무슨 신기한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말했다. 어머니의 그런 반응은 훗날 나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그건 어머니를 떠나서 뭔가를 해보겠다고 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말았던 즈음에 일어났다. 생전 만져보지도 못한 돈을 고스란히 갚아야 했던 나는 매일 울면서 기도했다. 새벽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는 주방에서 밥을 하고 있었다. 그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숱한 욕과 악다구니와 폭력을 썼던 어머니는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 입에서 그냥 그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엄마, 사랑해요. 갑자기 나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니가 내게 다가와서 우뚝 섰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도 않은 채 나는 한 번 더 그 말을 했다. 엄마, 사랑해요.


“네가... 네가 나를 다 사랑하나?”


그게 어머니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부둥켜안았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상처만 받았다고 믿었던 어머니. 완강하게 자신과 세상을 쏘아붙였던 어머니, 사랑을 거부하기로 작정했던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


나를 끌어안은 채 떨리는 음성으로 어머니가 말했다. 그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순간 어머니가 나한테, 내가 어머니한테 했던 모든 행위가 온데간데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 순간은 어떤 이유도 전제 조건도 필요 없었다.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 올라왔다. 모든 것을 뛰어넘고, 모든 것을 감쌀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것을 그저 인간의 언어로 ‘사랑’이라고 할 뿐이었다. 그 일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단 한 번도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생각했다. 실은 원래 가졌던 것이 가려져 있었고, 그걸 벗겨낸 것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헝클어져 엉망이 된 내 삶이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바닥을 친 내 자존감이 올라가고 있었다. 어떤 날 아침에 모녀가 같이 사랑한다고 울었다는 것이 뭐가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니었다. 내 삶은 그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나는 뭔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슬픔의 눈물 꼭지를 조금씩 잠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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