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말싸움을 피하라.
이 말을 들으면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해 바로 반박하고 싶어 진다.
“말싸움에서 이기고 싶은데, 왜 피해야 해? 그건 겁쟁이나 하는 선택지야. ”
“나는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 있고 상대방은 순 엉터리 논리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옳다며,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피해야 해? 차라리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이나 알려줘!”
물론 당신의 말도 옳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그러니 잠시 진정하고 다음 사례를 같이 봤으면 한다.
카네기가 파티에 참석했을 때 이야기다. 저녁을 먹는 중 옆 사람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유명한 구절 하나를 읊는다. “인간이 계획할지라도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신이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이 성경에 있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카네기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 아닌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구절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오류를 바로 짚어주었다.
그러나 지적을 들은 그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의 입장을 더욱 굳혔다. 그 둘은 서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침 옆에 있던 카네기의 오랜 친구이자 셰익스피어 연구가에게 누구의 말이 맞는지 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식탁 아래로 카네기의 발을 툭 치더니, 이야기꾼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카네기는 친구에게 물었다. “프랭크, 그 구절을 셰익스피어가 썼다는 건 너도 알잖아?” 친구는 대답했다. “물론이지. <햄릿> 5막 2장이잖아. 하지만 카네기, 우린 즐거운 연회에 손님으로 간 거잖아. 왜 그 사람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야 해? 그러면 그 사람이 널 좋아할까? 그냥 체면을 살려주면 좋잖아? 그 사람은 네 의견을 묻지도 않았어. 원치도 않았고. 그런데 왜 그런 사람과 논쟁을 해? 예리한 칼날은 피하고 보는 법이야.”
그 이후로 수많은 논쟁을 귀 기울여 듣고, 비판하고, 참가하고, 결과를 지켜본 카네기는 단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바로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
논쟁이 끝날 때, 논쟁을 벌이던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자신이 절대 옳다는 확신을 더욱 굳힌 상태가 된다. 논쟁은 이길 수 없다. 논쟁에 지면 진 것이고, 이긴다고 해도 진 것이다. 논쟁에 이긴다면, 당신은 상대의 주장과 마음을 상처 입히고, 그가 순 엉터리에 허접이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그러면 물론 당신은 기분이 좋고, 우월감을 느낄 수도 있다.
당신이 처음부터 이를 원했다면 언제든 논쟁하라.
다만 상대를 설득하고, 상대가 내 말을 들어주고 생각을 바꾸길 원했다면 완전히 틀렸다.
의지에 거스르는 동의를 한 사람은 전혀 의견이 바뀐 것이 아니다. (설득의 심리학 - 로버트 치알디니)
당신은 옳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문제라면 당신의 옳고 그름은 아무 소용이 없다.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 데일 카네기)
이는 최근 우리나라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경향신문에 작성된 오찬호 작가 칼럼의 초반부 내용이다.
납작한 논쟁의 나라 - 오찬호 (원본 기사 링크)
최근 <민낯들>을 출간하고 독자의 항의 메일을 받았다. 사회의 이슈들을 짚어보는 글쓰기가 업인지라 종종 욕설로 도배된 불만을 접하는 게 익숙한 편이지만 너무 구체적이라 놀랐다. 책의 첫 장인 ‘고 변희수 하사’ 사례를 언급하며 왜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냐, 성소수자 입장만 대변하는 이유가 뭐냐, 학생들이 읽고 동성애자 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 등의 내용이었다. 누가 읽을까 봐 중고책으로도 안 팔 거다 등의 악담도 덧붙였다. 그래도 나는 친절히 장문의 반론을 보냈다. 하지만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역시 자기만 옳은 줄 아네요. 그런 사람을 꼰대라고 하죠.”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며, 이를 세상에 과시하는 것?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사회 문제들을 알리고, 더 나은 방향을 위해 토론하고, 설득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소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친절히’ 장문의 반론을 보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선 아무리 친절하더라도 반론은 공격으로 간주된다. 오찬호 작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리 대척점에 있더라도 토론의 선을 지키면 서로가 다름을 정중히 이해하는 결론이라도 가능하지만, 자신을 기분 나쁘게 했다는 이유로 칼로 찌르겠다고 하니 비판자는 두려움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그는 논쟁이 허용되지 않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공유하고자 ‘납작한 논쟁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나 역시 그의 의견엔 일부 동의를 한다. 다만 나였다면 편지를 다음과 같이 작성했을 것이다.
“제 책을 읽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의견까지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같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독자가 있기에 우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에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당신처럼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당신과 나눈 이야기는 제 다음 책을 집필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작성했다면 최소한 ‘자기만 옳은 줄 아는 꼰대’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말싸움, 즉 논쟁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논쟁은 생각의 폭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나 역시도 논쟁을 좋아한다. 다만 때와 장소를 가리란 뜻이다. 본인이 논쟁을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생각해라.
학문적이고 극적인 승리를 원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호의를 원하는가? 둘 다 얻을 수 있는 경우란 많지 않다.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 데일 카네기)
마지막으로 링컨의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
“길에 대한 권리를 놓고 개와 다투다가 물리느니 그냥 개에게 길을 내주는 편이 더 낫다. 개를 죽여봐야 물린 상처가 저절로 낫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