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벨기에는 또 못 갔어요

이번엔 못 갔지만, 다음엔 꼭 혼자 간다

by AGING WELL

아이 둘 다 초등학생이 되면, 한 번쯤은 거하게 여행을 가자고 우리 부부는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그 다짐은, 첫째 아이가 두 돌이 되지 않았던 어느 여름, 육아휴직 복직을 앞두고 이유식 메이커기까지 들고 유럽으로 떠났던 여행에서 나왔다.
아이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리라며 의욕만 가득했던 그 여행은, 고생 또 고생의 연속이었고,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다음에 다시 간다면, 모두가 즐거운 시기에 가자.

큰아이가 세계사에 관심을 보이고, 둘째는 덩달아 아는 척을 하며 같이 이야기할 줄 알게 된 지금.

4학년과 2학년이 된 이 시기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큰 맘을 먹고, 정말 큰 돈을 들여 유럽에 다녀왔다.




사실 나는 유럽에서 석사도 마쳤고, 그보다 앞서 6개월 동안 인턴으로 일한 적도 있어서,
유럽은 나에게 그렇게까지 낯설고 새로운 동네는 아니다.
대학생 때 유행처럼 번졌던 유럽 배낭여행도 다녀온 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비어소믈리에가 된 이후,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유독 가슴 떨리는 나라가 생겼다.
바로 벨기에다.


전 세계 10개의 트라피스트 맥주 양조장 중 무려 5곳이 벨기에에 있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수도원 안에서 수도사들이 직접 만들거나 최소한 감독을 하고,

그 수익은 자선과 공동체를 위해 사용되는 맥주다.
단순히 ‘수도원에서 만든다’는 이유만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역사와 전통, 품질, 그리고 희소성까지 모두 담겨 있다.


비어소믈리에가 되기 전에는 오직 라거만 좋아했기에,
그렇게 자주 유럽을 다녔으면서도 벨기에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여행지로 가볼 기회는 있었지만 벨기에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유럽 여행을 하기로 결정하고, 우리는 어디를 갈지 회의를 시작했다.
각자 가고 싶은 도시를 종이에 적어서, 표가 많이 나온 순으로 일정을 정하는
나름대로 민주적인 방식이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벨기에는 단 한 표. 나만 적었다.

당연히 탈락.
벨기에는 이번에도 가지 못했다.

벨기에 이야기를 하도 많이 해서 남편은 그래도 한 표 적어줄 줄 알았는데,
그는 조용히 나를 배신했다.

실망해하는 나에게 남편은,
그래도 로마에는 트레폰타네(Tre Fontane) 트라피스트 양조장이 있으니 거기는 같이 가자고 했다.
정 안 되면 자기가 아이들과 놀고 있을 테니 나 혼자라도 다녀오라고, 약속 아닌 약속을 해줬다.




결국 우리 가족의 여행지는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로 정해졌다.

한국에 돌아온 지 이제 사흘째인데, 뉴스를 보니 유럽의 폭염이 꽤 이슈였던 모양이다.
6월의 유럽이었지만, 체감상으로는 완전한 한여름이었다.

햇볕은 내리쬐었고, 하루하루 여행의 질은 서서히 떨어져만 갔다.
나라별 맥주를 찾아 다채롭게 맛보겠다는 나의 계획은,
결국 무더운 여름날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라거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이쯤 되면 정말, 라거가 최고의 맥주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게다가 우리가 다녀온 세 나라는 하나같이 와인으로 유명한 나라였다.
마트에 가도 와인 코너는 화려하고 넓었지만,
맥주 코너는 상대적으로 초라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유럽 마트라면 적어도 한국의 바틀샵 정도는 될 거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매대는 우리나라 대형마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일 맥주나 트라피스트 맥주가 쫙 깔려 있을 줄 알았는데…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여기서 1차 실망.


두 번째 실망은, 로마 트레폰타네 방문의 좌절이었다.
첫 여행지였고, 시차에다 더위까지 더해져서 가족 모두가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두고 로마 외곽까지 혼자 다녀오는 건,
엄마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결국 스스로 포기하고, 로마 시내 마트나 바틀샵에서라도 트레폰타네를 사서 마시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걸까.
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걸까.

한국에선 판매하지 않는 이 맥주를, 로마에서도 못 본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서 마셔볼 수 있는 걸까.


마지막 여행 도시였던 파리.
숙소 체크아웃을 하고 나오는 길에,
4일 동안 있는지도 몰랐던 숙소 옆 건물 1층 바틀샵이 눈에 들어왔다.

기대 없이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정말 호텔 객실 냉장고만 한 공간에 맥주들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 Orval을 발견했다.

KakaoTalk_20250701_135236005.jpg 트라피스트 맥주 중 하나인 벨기에 Orval 맥주

벨기에의 트라피스트 맥주.

한국에서도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여행 중 처음 마주한 이 병 하나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미 짐은 다 싸놓은 상태였지만, 옷으로 병을 돌돌 감아 캐리어 안에 넣고
“한국에서 만나자” 하며 웃었다.

가족들은, 아이들은…
‘우리 엄마가 왜 저러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에서 가장 행복했던 맥주는 따로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 하이네켄 바에서 마신 생맥주 한 잔.



정말 수없이 마셔봤던 하이네켄이었지만,
그토록 신선하고 군더더기 없는 맛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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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맥주는, 양조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빠른 시간 안에 마셔야 제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아직 유년기인 아이들에게는,
선명하게 남을 첫 장거리 가족 여행이었을 것이고,

이제 중년이 무르익는 우리 부부에게는,
젊은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시간이었을 테고,

비어소믈리에인 나에게는,

‘다음엔 벨기에부터, 혼자 가야겠다’는 다짐을 남긴 여행이었다.



이 글은 브런치북 시리즈 「나는 비어소믈리에가 되기로 했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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