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를 연구하던 내가, 이제 맥주로 감각을 말하는 이유
전업주부가 된 뒤, 인간관계가 확실히 좁아졌다는 걸 자주 실감한다.
한때는 나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주던 초중고 친구, 대학 동기, 회사 동료 같은 사람들은 어느새 멀어졌고,대신 아이와 얽힌 사람들—아이 친구 엄마, 학원 선생님, 담임교사—이 하루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 관계 안에서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지금 일하세요?” 혹은 “예전엔 어떤 일 하셨어요?”
묘한 호기심과 기대가 섞인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예전의 설명을 점점 덜 쓰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알래스카에서 기후변화를 공부한 박사였어요’ 같은 설명은 하지 않는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지금의 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는 너무 멀리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서다. 대신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는 연구하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애들 키우면서 가끔 비어소믈리에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러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우와, 비어소믈리에요? 와인 소믈리에는 들어봤는데, 맥주도 그런 게 있군요!”
그 감탄이 신기하면서도 반가운 순간이다. 그러면 나는 가볍게 덧붙인다.
“비슷해요. 맥주도 수많은 스타일이 있고, 그 맛과 향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음식이나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맥주를 추천하는 역할을 해요.” 그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 나 자신도 가끔은 ‘비어소믈리에란 정확히 어떤 사람일까?’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시세론(Cicerone)’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전통적인 와인 소믈리에처럼 맥주에 대한 지식과 서비스, 감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을 비어소믈리에라고 부른다. 이 분야에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자격 과정이 세 가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 뮌헨에서 시작된 교육과정인 Doemens(되멘스)다. 맥주의 역사와 스타일, 문화, 감각 훈련을 깊이 있게 배우며, 특히 유럽의 맥주 전통을 온몸으로 익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Cicerone은 미국에서 시작된 체계적인 자격 과정으로, 실제 맥주 산업 종사자들을 위한 서비스 중심의 커리큘럼이 특징이다. 그리고 BJCP는 맥주 심사위원 자격에 가까운 프로그램으로, 스타일의 미세한 차이와 테이스팅 능력을 중요하게 다룬다. 나는 이 세 가지 자격을 모두 갖고 있다. 각기 다른 나라, 다른 시선, 다른 방식으로 맥주를 해석하고 느껴보는 경험을 통해 그저 ‘좋아한다’는 감정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언어로 바꾸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자격들 덕분에 나는 지금 실제로 국내외 맥주 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테이스팅하고, 그 맥주가 가진 균형과 개성을 감각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늘 나를 다시 배우게 만들고, 동시에 살아 있다는 감각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스스로에게 ‘비어소믈리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면 무언가 사전적인 정의보다는 내 삶에 더 가까운 언어로 답하고 싶어진다. 나에게 비어소믈리에란, 감각을 다시 꺼내는 사람이다. 하루를 살아내느라 잊고 있던 미각과 후각, 탄산의 밀도, 향의 미묘한 온도, 그리고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씩 기억하게 해주는 사람.
연구자로 살다가 엄마가 되었고, 이제는 감각으로 익어가는 사람으로 다시 살아가는 지금, 비어소믈리에라는 이름은 그 모든 변화를 내 안에서 조용히 연결해주는 언어가 되었다. 비어소믈리에가 되기 위해서는 분명 일정한 훈련과 공부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작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당신이 마신 오늘의 맥주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떠올려보는 것. 그 순간부터 이미, 당신 안의 감각은 깨어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이 글은 브런치북 시리즈 「나는 비어소믈리에가 되기로 했다」 중
2편 / 비어소믈리에, 감각을 깨우는 사람 입니다.
이전 글: 왜 나는 맥주를 공부하게 되었는가
다음 글: 비어소믈리에 자격증 도장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