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로 상강 절기 이야기
본량 들판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용진산에 올라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한로, 상강 절기에 올라야 한다. 어딘들 아름답지 않은 들판이 있겠냐마는 제 눈에 안경인지 나는 본량 들판이 참으로 좋다. 네모 반듯이 나누어 놓은 들판마다 연둣빛 색깔들이 저마다 다른 빛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은 내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고 그래서 직접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움 이기도 하다.
우리 터전에서는 7살 아이들과 매달 용진산을 오른다. 아이들은 용진산의 봄과 여름을 이미 경험해서 가을의 용진산을 특별하게 기대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맘때의 풍경은 또 달라 정상에 오른 아이들은 한없이 해바라기 바위(정상에 넓게 자리 잡고 있어 아이들과 이름 붙여준 바위)에 앉아 본량 들판을 눈에 담느라 산 정상에서 한참을 머무르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이 즈음에 나들이를 나가서 만나는 자연이란 온통 노랗고 빨갛고 또 파랗다. 매일매일 자연에게서 선물을 받는 느낌으로 나들이를 다닌다. 나들이길에 만난 쑥부쟁이는 따서 중우절 국화전 해 먹고, 아침에만 볼 수 있는 나팔꽃을 따서는 광목천에 이쁘게 꽃물 들여 생일카드도 만들고, 7살 아이들 수놓는 천으로도 쓴다. 길마다 떨어져 있는 낙엽들은 주워다가 밀랍 크레용으로 탁본을 떠서 방을 울긋불긋 꾸며놓기도 한다. 가을은 갈무리를 하는 계절이라서 인지 나들이길마다 만나는 가을을 온통 교실에 갈무리해 놓는 것이 이 계절의 일이기도 하다.
상강 절기가 시작되면 들판에 서리가 내리는 날이 잦아진다. 그래서 마지막 농사일로 분주해지는 시기이기도 한데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둬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을걷이도 마쳐야 하고, 고구마도 거둬들여야 한다. 그렇게 농부들이 바쁘게 수확을 하고 난 들판은 이제 완전한 우리 차지가 된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아이들이 들어가서 뛰어놀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들판에 가을걷이가 끝나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남은 벼이삭을 주워서 열심히 껍질을 깐다. 쌀알을 까먹고 있는 거다. 열심히 껍질을 깐 노고라는 게 아주 조그만 쌀알 한 알 뿐이지만 먹어서 간에 기별도 안 갈 그 쌀알이나마 열심히 껍질을 까서 먹고 또 먹는다. 자신의 노동으로 얻어낸 쌀알의 소중함이 맛을 느끼는 중추신경에 맛있다고 느끼도록 능동적 기억 변이를 시도하는 것은 아닐까. 별 맛없는 벼이삭도 열심히 채집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비단 별 맛도 안나는 쌀알도 그리 열심히 줍고 다니는데 달디 단 고구마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텃밭엔 씨알 굵은 고구마를 캐고 남은 상품가치 없는 고구마들이 뒹굴고 있는데 아이들은 그마저도 싹 긁어모은다. 사실 못생기고 가냘프기 그지없는 그 고구마들을 생으로 벗겨 먹었을 때 얼마나 맛있는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 유혹 때문에 아이들은 '오늘 나들이는 어디로 갈까?'에 대한 대답이 매일 똑같다. 오늘은 다른 곳을 가보자고 해도 아이들은 한사코 어제 다 못 캔 그 고구마에 대한 미련으로 또다시 모종삽과 놀이용 숟가락을 챙긴다. 고구마밭은 흙이 붉고 부드러워 흙놀이 하기에도 더없이 좋다. 큰아이들이 열심히 고구마를 찾아 땅을 파고 다니는 동안 작은 아이들은 흙놀이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형님들이 한쪽에 모아놓은 고구마를 찾아내 몰래 고구마를 가져가 앞니로 껍질을 까서 먹는 아이들도 있다. 몰래 가져간 것보다 흙이 묻은 고구마를 먹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돌아가서 씻어 먹자고 하지만 아이들은 앞에선 알겠다고 하며 교사가 안 보이는 곳에 가서 몰래 또 까먹는다. 입 주변이 흙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아이들을 보며 웃어야 할지, 혼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교사를 난감하게 만드는 일에는 천재적인 아이들이다. 그렇게 모은 고구마들은 아이들이 안보는 틈에 적당히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선별해서 버릴 것은 버린다. 그리고 남은 것들은 1년에 한 번 하는 터살이(6살, 7살 아이들과 1박 2일 동안 터전에서 생활을 하는 연례행사)를 하는 날 밤에 모닥불에 구워 먹기도 한다. 그렇게 먹는 고구마는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고구마이기도 하다.
고구마와 쌍벽을 이루는 가을 단골 간식은 동네 지천으로 널린 감이다. 단감부터 따서 먹기 시작해서 대봉감이 익어갈때까지 매일이 감이다. 대봉감은 홍시로 먹기도 하지만 말려서 곶감을 만들고 감말랭이도 만든다. 동네 어르신들께서는 감을 딸 인력이 없어 감나무를 통째로 아이들에게 맡기기도 하시는데 양이 어마어마해서 이 날은 1년에 몇 번 쓸까 말까 한 손수레가 대동되기도 한다. 손수레가 넘치도록 가득 실어 온 감을 매일 간식으로 먹는데 아이들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지 그만 먹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맛도 그만이지만 감을 먹으면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도 챙길 수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감을 먹으면서 나오는 감씨 안에 숨어있는 떡잎이 그것이다. 처음엔 내가 아이들에게 숟가락이라며 보여줄 생각으로 한 번 시범 삼아 보여준 것일 뿐인데 이제는 감씨가 목적이 되어 특별히 씨 있는 감을 찾아 먹으며 씨앗을 모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심지어 그 숟가락 같은 떡잎을 찾아주느라 매일 내 어금니가 고생을 하고 있으니 이를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할지. 덕분에 아이들이 포동포동 살이 오르고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삼는다.
입동이 다가오면 이제 본격적인 겨울 준비를 해야 한다. 가을이 준 영양 만점 간식들로 아이들의 몸은 이미 겨울을 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